철 늦은 꽃 (43) 분수령 ⑨
발행일1969-10-26 [제691호, 4면]
용신이가 켜는 슈먼의 트로이·메라이들 듣고 있던 C씨는
『그만!』
곡이 채 끝나기 전에 제지했다.
『혼자서만 연습했다지?』
『예.』
용신이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대답했다.
『소질은 있는 듯하지마는…』
C씨는 곧 통담배를 피워 연기를 내뿜으면서
『잡초 속에서 제맘대로 자란걸 어떻게 바루잡아, 키운담?』
혼자 말처럼 뇌이고 현주를 보았다.
『그래도 선생님께서 바로잡아 주셔야지요』
현주도 용신이 못지않게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말했다.
『글세요』 C씨는 담배연기만 연성 내뿜을 뿐 이내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선생님 수고스러우시겠지마는 승낙해 주세요』
현주는 마치 치마바람 학모(學母)처럼 C씨에게 애결하다 싶이 했다.
C씨가 힐끔 현주를 보고 용신이를 보더니
『견디어 낼까?』
머리를 갸우뚱했다.
『견더구 말구요. 그건 걱정마세요. 제가 있으니까요』
현주는 안타깝게 말했다.
『현주씨가?』
C씨는 현주를 또 힐끔 보더니 다시 용신이를 보고
『초보부터 출발해야 하는데 따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아예 처음부터 그만둬야 하는 거야, 견디어낼 수 있을까?』
문초하는 듯한 강한 어세로 물었다. 용신이 이내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답해요. 하겠읍니다고… 견디구 말구요. 하구…』
현주는 안달이 난다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용신이의 입이 열렸다.
『견디겠읍니다.』
『그래 그렇게 대답해야지. 견디구 말구요.』
현주가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이 의자에 몸을 붙여 앉았다.
C씨 집에서 나와 골목에서 현주는 용신이의 다리를 꼬집어 놓았다.
『왜 얼른 자신있게 대답을 하지 않구 날 속상하게 했다는 거야』
『선생님 속타하는게 재미있어서』
현주는 용신이를 되게 흘기면서
『이 악동(惡童)아 그건 무슨 심뽀지?』
그리고 이번엔 용신이의 등을 쾅 주먹으로 쥐어박았다.
『아쿠구』
용신이는 현주가 그렇게 저를 아껴주고 보살펴 주는게 마치 어머니의 애정 같아 흐뭇하고 힘이 솟아났다.
(어떻든 성공해야지)
용신이의 바요린 공부는 현주에게 보답하는 길이 이것뿐이라는 굳은 결의를 되새기면서 날로 맹렬해졌고 본격적인 진전이 눈에 보일듯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현주는 방에서 열심히 악보를 향해 서서 바요린을 켜고 있는 용신의 모습을 흐뭇하고 믿음직한 눈으로 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Y 교수로 부터였다. 곧 만나자는 것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용신이 바요린에 열중하면서부터 한때 거칠었던 행장이 가라앉아지고 있다는 보고를 Y 선생에게 전하고 그리고 어떻게 집으로 들어가도록 박훈씨에게 구체적으로 추진할 것을 부탁하려던 참이었다.
곧 뛰어갔다. 학교 Y 교수의 방에서다. Y 교수는 현주를 반갑게 맞이하더니
『박훈 선생이 C씨를 만난 모양인데, C씨가 용신이의 칭찬을 몹씨 했다더군… 그래서 박훈 그 병적인 고집을 굽혀, 전과 (轉科)하는데 기울어지게 됐어요. 그런데 한가지 난관은 건축과와 음악과는 이미 전과가 될 수없는 거거든, 이 난관에 부딪치고 말았단 말이오. 그래도 꼭 음악으로 나갈 의사라면 부득이 일학년에 입학시험 쳐서 합격하는 길밖에 없으니 용신이를 그래도 좋다고까지 열성을 가지고 있다면 할 수없는 일이라는데까지 박훈씨를 설득해봤어요. 그러니까, 용신한데 그런 뜻을 권하고 때로 일학년에 입시를 치루겠느냐? 그렇지 않으면, 지금있는 과에 그대로 있으면서 C씨의 지도 밑에 바요린을 공부하겠느냐, 두가지 길중의 하나를 택해야겠는데, 여기 한가지, 용신이라는 아이가 그동안 결석이 많고 강의를 잘 듣지 않아, 이 학기 학점이 미달이 됐다. 그런 말이오.』
현주는 이만큼만 들어도 Y씨가 내리려는 결론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차피 유급(留級)이 될거니까, 입시를 새로쳐 아주 그길로 나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적은 그대로 두고 딜레탕트 음악을 하던지 하라는 말이었다.
『잘알겠읍니다.』
현주는 역시 용신이의 어머니 같은 심정이 되면서, 집으로 들여보낼 구체적인 의논은 입에서 끄집어내지는 못하고 돌아왔다.
용신이는 열심히 바요린을 켜고 있었다. 그 진지한 모습을 보고 현주는 생각했다.
(전파가 되지않고 일학년에 입학시험을 치루고 들어가야 할바에는 그냥 지금대로 있는게 낫지 않을까?)
현주는 용신이를 외국으로 보내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러기 전에 집으로 들어 보내고 그래서 가정문제를 해결한 뒤에 떠나보내려고 설계하고 있었다.
구미(歐美)에 있을 때의 외국친구들과 아껴주던 교수들에게 그런 뜻을 간곡히 편지로 전했고 어디 장학금 같은 것을 얻도록 노력해 보겠다는 회답을 받기도 했다.
그런 것이 뒷받침이 되어 현주는 용신이를 지금대로 학적을 걸어두는 편이 낮겠다고 생각했다.
(입시를… 아이유 용신이에게 이제 고등학교 교과서를 가져다가 공부하도록해? 안돼 안돼)
현주는 스스로 머리를 살레살레 흔들었다. 그런 것은 모르고 용신이는 더욱 열심히 바요린을 켜고 있었다.
그 한군데 정열을 쏟아 넣고 열중하는 모습이 현주의 눈에는 성스럽게 보였다. 감동과 감격이 현주의 전신을 감싸돌고 있었다.
(용신이 너를 위해서는 내있는 힘을 다 바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