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고령의 베란 추기경은 사랑하는 조국 「체코」에 돌아갈 꿈을 안은채 「로마」에 망명중 서거했다.
공적으로는 「프라하」의 대주교이면서 4년 이상을 「로마」에 있는 「체코」대학에서 생활한 그는 지난 5월 17일 구내경당에서 미사를 드린 후 곧 쓰러져, 급보를 받은 교황이 그의 침상에 도착하기 2·3분 전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베란 추기경은 1888년 12월 29일 「프라하」 근처에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1911년 사제로 서품되고 1946년 「프라하」대주교로 임명받고 1965년에 추기경이 되었다. 그는 1942년 「프라하」신학교 교장으로 있을 당시 「나치」의 민족주의를 선전하지 않는다는 죄로 체포되어 「다카우」집단수용소에서 3년동안 노동을 하며 지냈는데 공산주의자 빈칵 박사는 「다카우의 추억」이란 책에서 그를 『훌륭한 노동자며 애덕행위의 중심이며 영감적이고 가장 선량하며 고상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1949년엔 공산치하에서 다시 체포되었는데 정부에서는 그가 신자들을 배반했기 때문에 그의 관저를 점령하여 노한 신자들로부터 그를 보호하고 있는 중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베란 경은 체포되기 일년전에 「로마」를 방문했을때 『교황의 마지막 강복을 받으러 왔다』고 했으며 그때 이미 신자들에게도 자기가 압력을 받고있어 그가 발표하는 말은 믿지말라고 경고한 것을 보면 보든 사태를 예견한 듯하다.
체포된 후 단 한번 정부를 비난하는 그의 서한이 공개되었는데 일년후에는 수명의 주교를 포함한 많은 성직자의 체포, 수도회 해산, 신학교와 다른 교회기관의 폐쇄, 동방교회와 정교회의 강제통합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1951년엔 「프라하」에서 추방, 외딴곳으로 옮겨져 15년동안 성무집행과 공식미사, 來客이 금지된채 연금생활을 했는데 정부성명서엔 항상 그를 「전(前) 대주교」로 표현했었다.
1961년 4명의 주교를 석방하고 베란 경이 공산주의에 충성을 서약하면 복권시키겠다는 정부 제안을 거절하자 정부에선 망명을 종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64년초에 「비자」를 청했으나 거절당하고 1965년 「체코」와 「바티깐」의 협상으로 그의 추기경 임명이 「로마」에서 발표되었고 3주간 예정으로 그가 「로마」로 떠나자 「체코」방송은 『순전히 자의로 떠났으며 「로마」에 영주할 것이다』라고 발표한 후 끝까지 그의 귀국의사를 거절했다.
그는 22년간 「프라하」의 대주교였으나 실제 사목활동을 한 것은 불과 2년반이다.
그의 서거로 추기경단은 133명이 되었으며, 공산주의와 대결하는 교회의 상징적 인물 4명중 또 한명의 거목이 쓰러진 셈이다.
다른 3명은 1960년에 서거한 「유고」의 스테피낙 추기경과 현재 살아있는 항가리의 민젠티 추기경과 폴랜드의 비진스키 추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