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第一本源인 하느님께 예속하는 정신생활 즉 기도는 쓸데없고 有害한 영상으로 가득차서 난잡해진 良心속에 어떠한 位置를 차지하게 되겠읍니까?
잠시 동안의 休止 反省 批判으로 이것을 깨닫게 하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는 영화감상회 같은 것은 이러한 영상의 암시력에서 해방된 自律을 되찾아주는 기회가 될 수 있읍니다.
생각은 환상적인 꿈위에 떠다니고 의견이 형성됩니다. 만약 이것을 기술적이고 심미적인 기준에 의해 받은 인상을 재는 데에 국한시키지 않고 그것들을 人間의 이념과 윤리생활로 비교한다면 더 높이 도달하려는 노력, 다시 말하면 영신적인 영역을 향해 다음엔 종교적인 영역에까지 이르려는 노력이 가능할 수도 있읍니다.
인간은 특히 젊은이들은 이러한 수단(대중전달수단)을 사용하는데 있어 온건파 자제를 기루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의 목표는 언제나 그들이 보고 듣고 읽는 것을 더욱 분별심있게 포착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교육자나 적절한 전문가들과의 토의는 성숙한 판단을 기르도록 젊은이들을 교육시켜 줄 것입니다.
우리는 知覺할 수 있는 경험의 길을 넘어서 위로 걸어가야 합니다. 知覺할 수 있는 경험은 그 매력과 대상으로 우리를 낭떨어지 밑으로 내려가는 생활로 이끕니다.
우리는 빠스카적인 뜻에서 오락의 구제책을 찾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얼빠지게 하고 흔히 불건전한 경험에로 몰입시키는 산만한 오락을 우리가 내적인 自身에로 되돌아가 거기에서 고무적이고 형언할 수 없는 종교적 경험을 기다리는 방법으로 치료해야 합니다.
인간을 단일次元 즉 제한·제복화·기계화 순전히 육체적이고 비인간적인일에로 이끄는 예를 하나 생각해 봅시다.
그러한 일을 하고나면 인간은 지치고 허탈해 집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인간이 자기 자신과 하느님에게로 되돌아갈 수 있겠읍니까?
육체적인 휴식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자유와 오락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르고 정당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치고 물질화한 노동자를 인간으로서 그리고 크리스찬으로서의 자기의 본모습에로 항상 되돌아가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인간을 정신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치료가 필요합니다. 침묵·우정·가족의 사랑·자연과의 교제·명상과 선행의 실천이 그 치료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도가 용이해지고 산기도가 됩니다. 만약 노동자의 은밀한 요구와 고통받은 태도가 종교적이고 이지적이고 다정한 순간을 바침으로써 도움을 받는다면 가족들의 기도와 미사 때의 조그만 기도가 효과적인 뒷받침이 될 수 있읍니다.
그렇게 해서 생명은 그 품위를 되찾고 마음은 사랑하고 즐기는 능력을 되찾습니다. 이것이 현대 노동계급의 커다란 종교문제입니다. 그러나 각 인간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각자의 독특한 길을 찾아낼 수 있읍니다. 그것을 해결하는 지름길은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의 보탬과 찬미를 요구하시고 그리스도의 성사적 현존이 우리를 신덕과 망덕과 애덕에 잠기게 해주는 천상적 교제속에 한시간동안 자신을 몰입시키는 것입니다. 현대문화에서 이끌어 낸, 그리고 일반적으로 과학적인 합리성과 논리적이고 심리적인 비관주의에 바탕을 둔, 다시 말하면 형이상학적인 상승과 신앙의 받아들임 그리고 현대문화와 동등한 종교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합리적 원리가 없는 마음의 상태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싶지 않읍니다.
이러한 경우에도 앞을 내다보고 사회질서가 앞으로 발전하는 가운데서도 신앙을 되찾아 줄 수 있는 삶의 이유를 현명하게 추구함으로써 교육학적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삶의 이유는 종교적인 감성을 요구하며 크리스찬적 「메시지」를 찾아내고 즐겁게 쏟아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삶을 발견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 삶은 하느님과의 접촉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와 같이 생각하시길 빌며 강복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