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宗敎觀(종교관)] ㉗ 人間無力(인간무력) 느낄때 宗敎(종교)는 必然(필연)
勸善懲惡(권선징악)의 現世的(현세적) 敎訓(교훈)으로도 유익
발행일1969-06-01 [제671호, 4면]
나는 종교를 위한 종교에는 반대고 인생을 위한 종교라야 되겠다는 주장에는 찬성하는 까닭으로 상대적인 의미에서 과학이 진을 찾고 예술이 미를 이상으로 함과 아울러 종교에서는 선과 정의와 사랑을 우리가 구하고 있다고 본다.
선의 범위를 넓히면 정의와 사랑은 그속에 포함될 것이고 교육의 목적을 지 · 덕 · 체로 나타낼때 덕은 종교에 관련된다.
설악산에 높게올라 둘레의 봉우리를 조용히 둘러보며 자연과 인생을 비교해 본다든지 넓고 아득한 바다의 크고 작은 파도소리를 들으며 바닷가에 초라하게 서잇는 자신을 미약하기 짝이없는 존재라고 생각할때 우리는 이 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어떤 큰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에 자기 무력을 통절히 느낄때 우리가 그 힘에 의지하려하는데서 종교심은 싹튼다.
자기가 무력하니 큰 힘에 의지하여야겠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우리를 해하고 잡아먹기나 할 것 같이 생각되는 악마이기를 원치않고 선한 사랑에 가득찬, 의지하고 싶은 뜨뜻한 존재이기를 바란다.
그러니 절대적인 힘, 능력, 사랑, 정의와 그밖의 모든 좋은것을 고루 갖추어가지고 있는 존재가 이 감각 세계에서야 어디서 찾아질 수 있겠는가? 여기서 사람들은 신을 상상해냈다.
이 우주의 신비를 인간은 누구나 인정아니할 수 없다. 사람의 출생 그 자체부터가 경이적 현상이다. 다만 이 신비를 무기적인 것으로 보는데서 무신론이 나오고 유기적인 사실로 인정할때 유신론이 생길뿐이다. 인생이 나고 죽고 세월이 오고가고, 만상이 생겼다 꺼졌다 하는 것을 우연이라고 결론짓고 인과법칙만으로 따져보려는 태도가 있는 반면에 전지전능하신 신의 조화라고 감탄하며 그를 모시려는 종교적 자세가 있다.
그러기에 과학은 실험적이고 종교는 신앙적이다. 종교에서 신앙을 제일 의로 삼는다고 허황하다는 평도 있으나 신앙을 위주로 하는데에 오히려 종교의 장점은 있는 것이다. 내세의 영광을 막연하나마 믿게해주니 말이다. 내세의 유무를 천당이든 지옥이든 간에 증명할 수는 없으니 믿을 수 밖에 없고 옳은 인생을 살면 예수께서 우리의 원죄를 사하셨으니 천당에로 갈 희망이 더욱 짙다는 신념을 줌은 권선징악의 현세적 교훈으로서도 좋은 착상이다. 무슨 해가 있겠는가?
아기가 잠들때엔 엄마가 옆에서 재워주기를 바란다. 엄마가 없으면 울다 지쳐서 눈물방울이 감든 눈 언저리에 고인채 자는데 가엽다.
마침 엄마가 있으면 와서 함께 누워 젖을 물리고 재운다. 참 행복한 아기의 자는 얼굴이다. 어머니가 아기와 함께 끛까지 낮잠을 자고 있을 수는 없으니 현명한 어머니는 살그머니 큰 베개를 가져다가 자기 누웠던 자리에 뉘어놓고 아기의 팔로 그 베개를 엄마인양 안고 자게한다. 중간에 깨어서 어머니가 아니라 베개임을 알게되는 아기는 불행하다.
성경을 걸구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받든다면 좋다. 또 종교심을 북돋는 한문학적 작품이라고 보아도 좋다. 작품이라고 생각할때 상상적인 예쑬적인 표현은 얼마든지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것은 움직이는 편으로 기울어져 간다. 가만히 서서 노래만 부르면 되던 가수도 요즘엔 몸짓을 하며, 춤도 추며 재치있는 문답도 주고 받을 줄 알아야 불린다. 악대도 행진을 하며 때로 대원들이 어떤 모형도 그려 나가며 연주를 하여야 효과를 더한다.
종교도 움직여야 힘이 된다. 신이 자기 앞에 나타나 주시기를 기다리며 매일 성소에 나아가 정성된 마음으로 기도를 올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 성소문 앞에 병신 거지가 적선하라고 이 사람을 보고 매일 조른다. 정성된 마음으로 기도하러 들어가는 이 사람을 귀찮게 하는 거지를 그는 외면하며 기도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몇달이 지나도 신은 그에게 나타나 주시지 않았다. 남을 돕는 선을 행하지 않고 다른 어떤 길이 있겠는가라는 이야기다. 배곺은 이 마음 아픈이가 종소리 나는 곳 십자가 서있는 곳에로 발길을 옮기게 되는 데에 종교의 소중함을 나는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