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救世史(구세사) 교실] ㉜ <모세時代(시대)> ⑪ 敬神法(경신법) 規定(규정)
肉的要素(육적요소) 가진 人間(인간)에게
敬神感情(경신감정) 外的表現(외적표현) 必要(필요)
발행일1969-11-02 [제692호, 2면]
■ 레위 記
『그때 구름이 모임의 장막을 덮고 야훼의 영광이 머물 곳을 가득채우매 모세가 모임의 장막으로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그 위에 구름이 머물러있고 또 야훼의 영광이 머물 곳을 가득 채웠기 때문 이니라』(출애 40·34~38)
이것은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잇는 고리와 같은 대문이다. 야훼께서 머물 곳에 드신 이 사건은 몇가지 문제를 제기하였다. 첫째로 그처럼 존엄하신 「손님」을 어떻게 모셔야 하는가하는 문제이다 이 물음의 답은 이스라엘 경신례의 주요 외적 요소를 이루고 있는 「제물을 바치는 법」 즉 祭式에 관해 記述한 레위기 제1부 1~7장에 실려 있다. 하느님에게 제물을 바치는데 불가결한 요소는 흠승과 감사와 화해이지만, 사람의 본성은 靈的인것과 肉的인것을 아울러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내적이고 영적인 敬神감정을 외적으로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레위기가 제사의 외적인면을 말할 때 그 외적인 행동(예절)은 개인의 영혼 속에서 동시에 눈에 안보이게 진행되고 있는 것을 표현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 내적인 흠숭·감사·화해의 정이 없는 곳에 참된 제사가 있을 수 없다.
레위기 제2부 8~10장에는 합당한 사람들을 선발하여 하느님과 선민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할 권능을 公的으로 부여하는 「사제 축성 예절」이 기술되어 있다. 제관들은 특별히 하느님과 가까운 신분이므로 그들에게 요구되는 聖性을 강조하고 있다. 나답과 아비후가 벌받은 이야기는 하느님의 제관이 지켜야하는 聖性을 강조하기 위해 기재된 것이다.
그다음 이스라엘백성은 그들 가운데 현존하시는 하느님과 이렇듯 친밀한 만큼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느냐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에 대하여는 레위기 제3부 11~16장 『정한 것과 부정한 것에 대한 규정」에 대답되어 있다. 이 부문에 기록된 것들은 순전히 법률적인- 간접적으로는 도덕적이고 위생적이기도 한 부정이다.(예컨대 아기를 낳은 후에 걸리게 되는 부정)
오늘날 우리의 크리스찬 생활에서 이 儀式上의 부정에 제일 가까운 것은 영성체전의 空心齋이다. 공심재를 안지켜도 죄는 안되지만 일단 깨뜨렸으면 영성체를 할 수 없다. 이와 같이 구약에서 어떤 상태와 행동들은 경신례에 참여하기에 부적합하다고 간주하고 그러한 상태나 행동을 부정이라고 불렀다. 이 儀式上의 부정은 고대의 관습과 「타부」 혹은 편견들에서 기원한 것이다.
그밖에 민족의 단결을 촉진하고 사후생활의 조화를 유지하려는 의도와 위생적인 이유도 곁들여졌다. 모세가 이같이 고대의 「타부」 관습들을 전례에 도입한 것은, 이전에 異敎的 성격과 배경을 가졌던 풍습들에 唯一敎的 성격을 부여함으로써 오히려 異敎의 영향을 배제하고, 또 가능한限 자기민족의 시민적·사회적·도덕적·종교적 생활을 唯一神의 흠숭에로 定位케 함으로써 그들의 순명정신을 훈련시키는데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 교훈적 효과는 오늘의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다.
레위기 제4부 17~26장 『성스러움(聖性)의 보존에 관한 법』은 하느님과 이렇게 親父하도록 부름을 받은 백성은 어떤 道德律을 지켜야 하느냐를 敎示하고 있다. 이스라엘사람들 상호간의 행위를 규제한 기본법은 『네 이웃을 너 자신같이 사랑하라』는 것이었다.(레위 19·18)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이웃이라고 하면 자기 동포만을 생각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레위기 19장34절의 異邦人대우에 관한 대문에는 잠재적이나마 보편성의 징조가 뚜렷이 엿보인다. 여기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써 모든 의혹을 일소하셨다.
예수님은 이 비유 이야기 끝에 율법학자에게 『이 세사람중 누가 부상당한 사람을 <이웃>으로 여겼느냐?』(우리가 보통 기대할 수 있는 질문이다)라고 물으시지 않고 반대로 『이 세사람중 누가 자기 행동으로써 부상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었느냐?』라고 물으셨다. 이것은 극히 중요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마지막에 율법학자에게 던진 이 질문의 표현 안에 그 비유의 요점 즉 본연의 「케리그마」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율법학자들이 대표하는 후기 유테아교에 반대되는 새롭고 혁명적인 隣人觀이었다. 당시 유데아교에서 말하는 <이웃>의 범위는 매우 좁은 것이어서 구약성경에 나타난 것보다 훨씬 제한된 것이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혈연·혈통·종족·문화·종파·당파 등 모든 자연적· 인위적 경계선을 타파하고 전인류를 하나로 묶는 종국적 「비젼」을 우리에게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