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이미 70년전에 「레룸·노바룸」이란 회칙을 반포하여 노동문제에 대한 교회의 원칙을 제시한바 있다. 요한 23세는 「지상의 평화」 「어머니와 교사」를 반포했고 현 교황 바오로 6세는 「제민족의 발전」이란 회칙을 반포했다.
바오로 6세는 지난 6월 10일 국제노동기구(ILO)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우리교회가 노동자를 위한 이같은 강연회를 이제야 개최한 것은 무척 뒤늦은 감이 있다.
최근에 『인간이 있고 정치가 있다』고 정계의 한 저명인사가 개헌유세에 앞서 말했다. 사실이다. 인간이 있고 인간을 위해 정치는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있고 경제가 있다. 인간을 위해서 경제성장이 요청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현실에는 너무나 자주정반대의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노동문제이다. 『노동자도 인간이다』 이 명제에 의심을 품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노동자가 우리나라 기업내에서 노임을 비롯하여 여타 노동조건하에서 과연 충분히 인간대우를 받고 있느냐? 이렇게 반문하면 그렇다고 자신있게 답할 사람은 아마도 희소할 것이다. 나는 한국의 노동문제의 근본 문제는 여기에 있다고 본다.
■ 勞使間의 人間關係
일반적으로 기업주는 저임금에서 고이윤을 짜내는 생리에 젖어있다. 이런 현상은 경제이전의 인간착취이다. 뿐만아니라 8시간 노동제가 잘 지켜지는 일은 거의 없다. 해고도 사용주 마음대로 이다. 노동력이야 헐값에 언제든지 쉽게 대치시킬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통념이다. 고장난 기계의 부분품을 바꿔치우는 것보다도 더 쉽게 생각한다.
한마디로 노동자나 그에게 따른 가족의 생계는 사용주의 임의에 맡겨져 있고 그 손에 운명이 좌우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분명히 노동자를 사람대우가 아닌 생산도구 취급이다.
물론 노동자의 주장은 언제나 타당하고 기업주의 그것은 언제나 부당하다는 말은 아니다. 불실한 노동자가 적지 않을 것이고 또 양심적인 기업주가 없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기업주들이 경제의 여건으로 말할 수없는 부담과 부채에 억압되어 경영의 합리화를 기할 수없는 딱한 실정에 놓여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사용주들의 노동자에 대한 관념은 일반적으로 전근대적임은 사실이다. 그들의 자세는 봉건사회에서 지주가 노예에 대하는 것과 별차 없다. 이것은 분명히 경제이전의 인간관과 사회관의 문제이다. 윤리와 양심의 문제이다.
근대화는 물질적 건설만으로 이룩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함께 향상됨으로써 이다. 경제성장이 바로 사회발전을 뜻하는 것이 아닌 이유도 바로여기에 있다. 성장의 그늘 아래 인간이 소외당하는 경우가 우리에겐 너무나 많다.
■ 政府政策의 盲點
정부정책이 때론 이같은 현상을 또한 더욱 조장하는 경우가 많다. 수출증가로 이 나라를 하루속히 부유한 공업국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강력한 의욕을 높이 평가하는 바이나 기업성장과 수출진흥의 전략을 주로 저임금에서 짜내는 것은 분명히 착각이다.
근로자의 생산의욕증대가 전제되어 기업성장이나 수출증가가 가능하다는 것은 경제발전 초보적 원리일 것이다.
정부나 기업주는 경제성장을 위해 우리나라가 지닌 큰 자원은 바로 노동력임을 잘 인식할 것이다. 그런데 노동력은 단순한 물리적 힘이 아니다. 육체만의 힘도 아니다. 피가 흐르고 불멸의 정신을 지닌 고귀한 인간의 힘이다. 이 인간의 힘이 우리의 자원이다.
그렇다면 이 자원의 선용여하에 우리의 경제성장과 조국근대화가 좌우된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인간의 힘, 국민의 힘, 노동력이라는 이 소중한 자원선용은 바로 근로자들에게 자발적으로 생산에 참여할 수 있게끔 여건을 조성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건강과 최저생활보장, 생활양상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며 그래서 안심하고 일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나아가 경영참여의 길까지 열어주는 것이다.
한마디로 근로자를 생산도구만으로써가 아니라 존엄한 인격자로 대우해야 한다. 저임금으로 굶주리고 병든 노동자에게 생산의욕을 요구한다는 것은 모순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더욱이 대부본의 근로자들에게 노조결성권, 단체교섭권, 파업권 등 헌법과 노동법에 엄연히 규정된 노동삼권이 사실상 묵살된 데서 어떻게 그들에게 근면성실이니 창의력이니 생산참여의식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정부는 경제가 있고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있고 경제가 있다는 이 단순한 진리에 입각하여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정책을 실천해주기 바란다.
동시에 기업주들이 경제의 여건에 얽매이지 않겠끔 강력한 행정적 뒷받침을 해주어야 할 것이다. 현재 기업주들은 경영보다도 정치추이에 더 관심을 쏟고 있고 거기에 정력과 시간과 돈을 더 소비해야 한다는 기현상이 적지 않다. 이것은 경제발전의 암적 요인이고 시급히 고쳐져야 할 문제다.
■ 희생은 누가먼저?
우리는 누구나 모두가 오늘의 한국이 결코 부한 나라가 아님을 알고 있다. 참으로 세계속의 한국으로 성장하기까지는 많은 난제가 우리 앞에 가로놓여 있다. 국민 모두가 보다 더 근면하고 더 많은 희생을 치루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국민들의 각성이 요망된다. 무엇인가가 일어나야 한다. 그것은 바로 국민의 정신혁명이다.
그러나 근로자들과 영세민들을 이 큰 목적을 향해 전진시키기 위해서는 이들을 이끄는 지도자들이 앞장서야 한다. 국정의 책임을 진 사람들과 사회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이 먼저 희생과 봉사의 십자가를 질줄 알아야 한다. 스스로는 배부르면서 굶주린 대중에게는 희생을 강요할 수는 절대로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오늘의 문제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노동문제의 해결도 근본적으로는 이같은 모습된 정신자세 생활자세가 시정될 때 비로서 가능할 것이다. 이는 또 우리민족의 과제인 경제발전 나아가 국토통일과도 직결되어 있다.
김수환 추기경(서울대교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