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社會發展(사회발전)과 勞動問題(노동문제)] 근로자의 歷史的(역사적) 位置(위치)
農耕(농경)책으로 近代化(근대화) 늦어
애국자·노동자 合勢(합세)로 日帝(일제)에 항거
日帝(일제) 때는 日人(일인)의 3분지1 노임으로 혹사
근대화라는 말은 합리화·민주화·공업화를 뜻하는 것으로 서구에서는 이미 2백년전부터 일어나 오늘의 번영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서는 오랜 봉건제도의 인습과 일제의 침략 등으로 이 운동이 제때에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가 요지음에야 본궤도에 올랐다. 여기에서 우리 근로자의 역사적 위치를 논함으로써 우리나라에 있어 근대화가 늦어진 까닭을 밝히고자 한다. 우리 근로자의 역사적 위치는 다음의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 이씨왕조 시대
이 시대에는 사회계급을 양반·중인·상인·노비의 넷으로 나누어 양반계급만이 오로지 정권을 잡고 중인계급을 하급관리로 쓰는 한편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으나 상민이하의 계급은 관청이나 양반계급의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뿐더러 상민계급은 병역의 의무와 납세의 의무를 지니고 있었으며 어떠한 권리도 갖지 못했다. 더우기 「농업이 천하의 대본이다.」라는 스로건을 내세우고 평민들로 하여금 주로 농업에 종사하게 하였으므로 상업이나 공업은 발달하지 못했다. 이조 말기에는 거듭 흉년과 착취에 못이기어 진주민란 동학란을 비롯한 민란이 자주 일어나 많은 백성이 조국을 등지고 만주로 이민을 갔다. 이러한 때에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이른바 갑오경장이라는 정치개혁을 일으켜 우리나라로 하여금 계급제도 등을 없애게 함으로써 근대화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일본세력을 두려워하여 2년 뒤에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1년 동안 머물면서 우리의 광산개발권·삼림채벌권·철도부설권 등을 모두 외국인에게 넘겨주었다. 이에 따라 농민들은 광산 노동자 등으로 채용됨으로써 근대적인 근로자가 생기게 되었다.
한편 로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우리나라의 재정·외교·경찰권을 뺏고 토지 조사사업을 일으켜 신고한 평민에게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는 한편 신고하지 않은 토지를 그들의 소유지로 만들어 동양척식회사를 설치하게 되고 그들의 상품을 풀어 놓았다.
■ 일제 통치시대
우리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두어 민족을 탄압하고 동양척식회사로 하여금 농민의 피땀을 뽑아 먹게 하였다. 이에 따라 중소지주들은 몰락하여 소작인이 되고 소작인들은 만주 등지로 삶터를 찾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정치에 반항하여 3·1운동이 일어나 노동자들 간에는 노동공제회가 생기게 되고 국산품 애용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국산품 애용운동은 특히 조만식 선생을 중심으로 하여 만들어진 물산 장려회에서 크게 일으켰다. 한편 전진한 선생들은 협동조합을 여러 곳에 만들어 근로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일을 했는데 때를 같이하여 애국자와 노동자가 뭉쳐서 일제에 반항하는 운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때에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우리국토는 군수물자를 만드는 공장지로 이용되고 일본인의 3분의1 밖에 안되는 노임으로 우리 노동자들을 혹사했다. 결과 1940년에는 260만명의 공장 및 광산노동자가 일제를 위하여 피땀을 흘리고 해외에서도 76만명이 일하게 되었다.
■ 해방 이후
일제의 패전으로 우리민족은 해방의 즐거움을 맛보았으나 그와 더불어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으로 전국 노동자 평의회(전평)가 만들어져 일제가 남긴 여러 기업체와 공장들을 한때 접수하며 전국의 적화를 꿈꾸게 되었다. 이러한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에 대항하고자 애국자와 지주들이 중심되어 한국 민주당을 만들게 되고 대한독립 노동총연맹이 생겼다.
특히 한국민주당이 주동하여 공산당의 타도운동을 벌이게 되니 공산주의자들은 남도당을 만들어 「전평」과 손을 잡고 철도노조원들의 파업을 조종하는 한편 국민들에게 「쌀 공출을 하지 말라」 「쌀 배급을 달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게 하던 끝에 대구·제주 등지에서 폭동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이러한 때에 38이북에서는 공산괴뢰정권이 수립되어 토지와 공장들을 모두 접수하고 모든 동포들을 집단노동에 출동시켜 수백만의 동포들이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이리하여 UN의 결정에 따라 대한민국이 수립되면 정부는 공산당을 불법화하는 법률을 만들어 좌익분자들을 숙청하고 미군을 물러가게 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괴뢰군은 6·25전란을 일으켜 동족살상의 참극을 벌이게 되니 이승만 대통령은 부산에서 근로자들을 이용하여 정치파동을 일으켜 헌법을 직선제로 개정했다. 한편 이승만의 자유당 정부에서는 부산에서 노동법을 만들어 그때까지 있었던 모든 노동단체를 해산시키고 대한노동총연맹을 만들어 정치에 이용했다.
결과 대한 노총은 이후 이승만 정권을 연장시키는 일에 이용되고 정치운동을 일으킴으로써 마침내 그 정권으로 하여금 무너지게 했다.
이에 따라 민주당의 장면 정부가 세워져 혼란한 정세에서나마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함에 힘쓰게 되니 직업별로 각종의 노동조합이 만들어져 시국은 더욱 혼란에 빠졌다. 이 혼란을 틈타 「양키는 물러가라」는 구호까지 나오게 되니 드디어 5·16군사혁명이 일어났다.
군사정부는 교회이외의 모든 사회단체를 불법화하여 그 활동을 금지하다가 1961년 8월에 발포된 군정법령으로써 산업별의 노동조합운동만을 허용하게 되었다. 오늘날은 부두노동조합 전력노동조합 광산노동조합 전매노동조합 등 16개의 산업별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각각 본부 지부 분회를 두고 근로자의 권익을 옹호하는 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이렇듯이 우리나라의 근로자운동은 비록 짧은 기간에서나마 어려운 고비를 겪어 오늘에 이르렀다.
오늘의 우리나라의 놀라운 사회발전의 그늘에는 피땀을 흘리는 113만여명의 취업노동자가 있다.
인간의 자유와 창의력을 말살하고 있던 공산국가 소련이 52년에 걸친 경제정책에서 실패하고 차차 미국의 그것과 같은 자유경제체제로 정책을 바꾸어가고 있음을 볼 때 그들의 정책이 실패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무신론적 태도도 차차 숙어지고 있음을 동구라파의 공산국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유홍렬(文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