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에 들어와서 최초로 기독교 신학자들간에 死神論이 대두되자 1965년과 66년에 「타임」紙에선 「死神論」을 특집으로 게재하기에 이르렀고 기독교신학자들 중에서도 사신론을 들고 나오는 자가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死神論을 펴고 있는 前衛神學者들의 사상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元祖가 바로 20여년전에 死去한 독일의 루터교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라고들 오해하고 있는데 있다.
지금 미국에선 「본회퍼의 위치 - 그의 사상의 문제와 가능성」 「본회퍼의 사상」 「본회퍼와 볼트만」 등을 출판하는 것을 비롯하여 독일에선 그의 연구논문집 「성숙한 세계」 4권을 출판했으며 한국에서도 「본회퍼의 사상」이라는 책을 내어 본회퍼의 「붐」을 이루고 있는데 그의 저서 「無宗敎的 基督敎」는 「신의 죽음」을 쓴 바하니안 「복음의 세속적 의미」의 반 뷰렌, 「기독교의 본질」의 해밀튼 등 현대 死神論的 신학자들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고 떠돌고 있다.
물론 얼핏 보기에 그의 사상은 死神論的 경향으로 오해받을 요소가 다분하다.
이러한 오해는 흔히 前後關係나 깊은 뿌리 - 即 본회퍼의 사상전반에 걸친 지식없이 그의 사상을 마구 사용함으로써 빚어지는 현상이다.
심지어 그의 사상단편들은 무책임하게 경구(警句)로서 인용되고 있는 형편이므로 오해의 가능성은 더욱 높다.
사실상 본회퍼의 이름은 기독교 사회에서 많이 오르내리며 그는 그의 저서 특히 「獄中 便紙」로 기도굑와 가톨릭 신학에 많은 영향을 끼친 人物이다.
그는 「聖會」 「나를 따르라」 「윤리학」 「성숙한 세계」 「무종교적 기독교」 「타인을 위한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 등 많은 저서를 통하여 그의 사상을 널리 폈는데 그의 저서를 바탕으로 하여 깊이 고찰해 보면 그의 사상은 「신의 죽음」이라는 개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는 결코 교회를 경시하거나 無用한 것으로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교회를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 내지 「그리스도의 신비체」로 생각하고 聖事의 필요성을 주장했으며 기도와 觀想의 기술을 실천하고 가르친 사람이다.
또한 교회의 임무가 자체의 근본을 잃지 않고 현세계와 전적으로 同化되는 것이라고 바로 보았던 사람이다.
그는 참다운 신앙인, 신앙의 실천자였다.
신앙인 본회퍼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는 1906년 독일의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명문출신으로 학식과 교양이 뛰어났으므로 자녀들은 학문적인 연구나 예술적인 추구를 마음껏 할 수 있는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그는 자라면서 독일이 第1次 세계대저에서 패배하여 「베르사이유」 평화조약기구에서 탈퇴당하고 혁명과 무질서로 분렬되고 「인플레」로 재정적 피를 흘리며 뻗어가는 힛틀러의 그늘 밑에서 민주주의를 꽃피우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아왔다.
17세때 신학을 연구할 뜻을 밝히자 가족들은 놀라고 반대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굴치않고 1923년 「투빈겐」에서 연구를 시작 1년후 「베를린」 대학교로 옮겨 하르낙 교수 밑에서 준엄한 사상적 훈련을 받고 1927년 박사과정을 마쳤다. 그때 이미 스승 하르낙과는 논점이 달랐으며 당시 명성을 떨치던 「본」대학교의 칼 바르트를 찾아간 자리에서 그의 주장에 반박을 한 적도 있었다. 또한 학생시절에 이미 열성적이고 능률적인 사목활동을 실천했으며 「로마」에 몇개월 머무는 동안 가톨릭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임시보좌로 「바르셀로나」에서 일하다 1930년 미국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1년간 강의한 후 독일에 돌아오자 「나치」 세력이 커져 종교에선 「나치」주의를 받아들이자는 주장과 협상하자는 파가 생겼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본회퍼는 학문과 집필과 종교활동과 규칙적인 기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1932년 목사가 되었으며 1933년 힛틀러가 권력을 쥐자 反힛틀러투쟁이 시작되었다.
누구보다도 먼저 그는 「루터」교의 위험을 정확히 豫見했다.
그의 설교는 직선적이고 예언적이었으며 교회를 점령하려는 「나치」에 맞서 잔인하고 교활한 그들의 수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저항했다.
1935년 「나치」는 강제로 조그마한 신학교로 보내더니 일년후에는 그 신학교 운영마저도 불법으로 선언했다.
1938년 힛틀러가 전면전쟁을 서두르자 본회퍼의 신변을 염려한 친구들이 미국에서의 강연을 주선했다.
1939년 6월 미국에 건너갔으나 조국과 민족을 생각하면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다면서 1개월 후 주위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귀국했다.
그후 反힛틀러 지하운동에 가담하여 공적인 연설과 출판을 금지당하고 1943년 4월 힛틀러 암살음모죄로 체포되었다.
감옥속에서도 동료 죄수들을 교화하고 격려하는 한편 그의 사상을 발전시키면서 그 어느때보다도 복음을 깊이 묵상하며 끊임없이 기구했다.
이때 그와함께 감방생활을 하던 한 영국인은 후에 말하기를 『당시 본회퍼는 완전히 남을 위해서만 살았으며 암흑속의 빛과 같은 존재였다.』고 회상했다.
『신은 십자가 아래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던 본회퍼는 1945년 4월 9일 「나치」정권이 붕괴하기 직전 사형장에 꿇어앉아 마지막 기도를 드린 후 교수형을 받아 처형되었다.
죤 S. 케네디 몬시뇰 記 (筆者=미국 神學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