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성경을 알게 된 것은 45년 전이다. 구약성경은 나에게 그다지 큰 흥미를 가져다주지 못하였지만 신약을 읽기시작하고 산상성훈에 이르렀을 때에 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또 산상성훈의 敎訓은 어린시절에 들은 무엇을 내 가슴속에서 메아리쳐 주었다. 이 敎訓이란 원수를 갚지 말고 惡을 惡으로 지말라는 것이었다.
내가 읽은 모든 것 중에 항상 나에게 남아있는 것은 예수께서 새로운 法을 세우시려 오셨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딴 法을 가지고 오진 않았다고 말하였고 모이세의 옛法에 무엇을 接木하기 위해 왔다고 하셨다. 사실인즉 그는 옛法을 어떻게나 변경하셨는지 새로운 法이되고만 것이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갑지 말고 한대 맞을 때 두대 맞을 준비를 해야하며 1「킬로메터」를 동행하자할 때 2「킬로메터」를 걸으라고 가르치셨다.
나는 스스로 이렇게 말하였다.
이 敎訓은 확실히 기독교적이 아니다라고. 내가 그때 기독교에 대해 가졌던 「이미지」는 한손엔 위스키병을 들고 딴손엔 비프스때끼를 드는 자유였었다.
산상성훈은 나의 잘못을 지적해주었다. 내가 진실한 기독교인 즉 하느님을 위해 살고있는 사람들과 접촉을 많이 갖게 되자, 산상성훈은 크리스찬생명으로 살기를 바라는 자에겐 기독교의 전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 성훈을 통해 예수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분의 일생 전기를 이 각도에서 읽으니 아직도 기독교가 할일이 많다는 것을 나는 느꼈었다. 『높은 곳에서도 하느님께 광이요, 땅에는 평화가 있어라』 실은 오늘날 하느님의 영광도 땅의 평화도 없다. 이러한 기갈이 체워지지 않는 한 또 우리의 문명에서 폭행을 근절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는 아직 탄생하시지 않는다. 진실한 평화가 이루어지는 날에는 아무런 시위도 필요없는 것이며 우리의 단체생활에나 개인생활에 하느님의 영광은 빛날 것이다.
산상성훈은 나에게 수동적반항의 가치를 일깨워 주었다. 나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을 읽으면서 기쁨에 가득찼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