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늦은 꽃 (44) 분수령 ⑩
발행일1969-11-09 [제693호, 4면]
현주는 용신이가 켜는 바요린의 멜로디를 들으면서 제방에서 일을 할 생각이 샘솟듯 했다. 건축설계다. M대학 동문희가 주동이되어 기금조성에 착수하면서 현주에게 맡겼던 민속박물관(民俗博物館)의 설계였다. 그동안 기금조성에 대한 사무가 중둥무의됐으므로 독촉을 받지 않고 있었는데 요즘 사무담당자도 결정하고 구체적으로 일을 추진한 뒤로 몇번 현주에게 설계를 제출하도록 말해왔다.
그 설계에 대한 것이었다. 처음 이야기가 있었을 때에는 현주자신의 귀국 최초의 역량을 보일작품이라고 부풀었으나 그동안 흐지부지하는 사이에 맥이 빠지고 말았던 일이었다. 착수해야 한다 한다하면서도 좀처럼 손에 잡혀지지 않던 일이 지금 용신의 바요린의 멜로디를 듣고 있노라니 저도 모르게 현주의 마음속에 의욕을 불러일으켜 주고 있는 것이었다.
현주는 테불에 붙어 앉았다. 처음부탁을 맡았을 무렵 떠올랐던 이미지를 적어둔 노트를 끄집어냈다.
머리속에 떠올랐던 건물의 외형부터 간단히 그려놓은 것이 나타났다. 그런 그림이 여러 페이지에서 발견됐다.
그림 하나하나에 연필로 주(註)를 붙여놓고 있었다.
그걸 보니 현주는 더욱 의욕이 솟아났다. 마음을 한층 가다듬고 구상(構想)에 몰두하려니 용신의 바요린은 점점 능숙한 솜씨로 긴곡을 무반주(無伴奏) 독주(獨奏)하고 있었다.
현주는 그 멜로디에 더 용기를 얻으면서 창작의욕이 북돋아지는 걸 쾌적하게 느꼈다. 새 종이에 새 투시도(透視圖)의 뎃상을 그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찢어버린다. 다시 한장. 또 찢어버린다. 세번 찢어야 겨우 약간 마음에 드는 것이 나타난 모양이다. 그것도 회심(會心)의 것은 아닌듯 머리를 갸웃했다.
그러나 이번엔 찢어 버리지 않고 남겨 놓고 또 새것을 그리고 있는데
『일- 열심이시네』
용신이의 목소리었다. 어느사이에 바요린 켜는 일을 마치고 현주의 방에 들어온 것이었다. 현주는 일에 열중했기 때문에 용신이가 연습을 끝마친 것도 그가 방에 들어와 옆에 온것도 통 몰랐다.
『아, 연습 끝났어?』
『언제 끝났다구…』
『난 몰랐군 그래』
『되게 열심이신데? 바요린소리 그친것두 모르고…』
『저는 어쩌고?』
『나?』
『아까 한참 열중할 땐 옆에 가두 모르지 않았어…』
『내가 선생님 옆에 온건 알았구요?』
용석조로 용신이 말을 했다.
『호호 나두 꽤 열중했나봐?』
현주는 뇌이고
『마침 잘 들어왔어. 쉴때두 됐으니…』
용신이 쪽에 돌아앉았다.
『이건 뭡니까?』
용신이는 스켓치북에 그려져 있는 건물의 뎃상을 보고
『응 집이구나. 그렇겠죠. 꽤 멋있는데 고전적인 양식이군』
느물댔다.
『네가 무얼 안다구!』
현주는 용신이를 흘기면서 주먹으로 라이트훅을 먹이는 것 같은 형용을 해보였다.
『아구 이거 막 후려갈기기네…』
하더니 용신이도 권투하는 자세로 현주에게 맞섰다. 용신이는 바요린연습 뒤에 무척 기분이 명랑한 모양이었다.
『까불지 마』
그래도 용신이는 권투하는 자세를 풀지 않고 깡충깡충 뛰면서 금시 현주에게 아파캇트라도 먹일것 같았다.
명랑해진 용신이. 그럴밖에 없는 일이다. C씨의 적절하고 엄격한 지도로 용신이는 그가 가지고 있는 천분(天分)을 십이분 발휘할 수 있어, 바요린 연주의 실력이 날로 진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좀처럼 말이없는 C씨도 용신이 앞에서 칭찬해주었고 용신이 자신도 스스로 그것이 알려졌다. 그래서 명랑해지고 있는 용신이었다. 응석이 끝난 뒤,
『그런데…』
현주가 용신이에게 말했다.
『다른게 아니고 오늘 Y 교수 뵈었는데…』
그리고 전과(轉科) 문제들 이야기했다.
『흥, 아버지 마침내 손들었군.』
용신이 하는 말을
『그렇게 말하는게 아니야.』
현주가, 나무랬다. 그러나 용신이는 입을 비쭉이면서 말했다.
『다시 입시를 치루어야 한다구? 흥……』
『그러기 때문에, 그냥 지금과에 있으면서 선생지돌 열심이 받는 거얘요. 난 그렇게 하기로 작정했어.』
현주의 말에 용신이는
『그까짓거 문제 아니예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얘길 들려드리려고 이방에 들어온 거예요.』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무슨 일인데?』
『그 선생님, 문하생 현악오중주 발표회를 갖겠다는 거예요. 거기 열심히만 하면 끼어 줄 수도 있다는 암시를 주었어요.』
『뭐? 그게 정말이야?』
『물어보면 될거 아니오? 그 선생님께…』
현주는 심장이 두근거림을 깨달으면서
『그랬으면야 얼마나 좋을까?』
용신이 앞에 다가 앉으면서 말했다.
『그래서 오늘두 열심히 연습한 거예요.』
『잘했다 성공을 빈다.』
『내 걱정은 마시구요. 선생님께서나. 거 무슨 설계죠? 얼른 작품하나 내 놓으세요.』
『그래야지. 이건 민속박물관 설계야 M대학의…』
『아주 깜짝 놀랄 작품 내놓도록 빌겠어요. 이렇게…』
용신이는 두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동작을 취해보였다. 그러는 용신이의 뺨을 현주는 꼬집어 쥐고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