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映畵隨想(영화수상)] 最近(최근)의 邦畵(방화)들
主題(주제) 잃은 文藝映畵(문예영화)들
영화에 있어서의 飜案(번안) 문제
脚色監督(각색감독)서 原作主題(원작주제) 상실
映畵(영화)에선 飜案物(번안물)도 平價對象(평가대상) 될 수 있어
잘팔리는 줄거리엔 모두 무조건 흉내
邦畵는 윤리적인 면에서 뿐 아니라 예술적인 면에서도 아직도 그 수준의 成達 · 未達에 대해서 논의되고 있는 형편이다. 본란은 앞으로 映畵倫理委員인 作家 金東里씨의 俊筆을 빌어 근래에 나오는 邦畵 전반에 대한 評을 수시로 싣기로 한다.
나는 지난 넉달동안에 1백10여편이란 방화(邦畵)를 문교부 영화위원(映畵委員)이란 직책에 얽매어 강행(强行)에 또 강행을 거듭하며 보아 넘기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근년에 와서 영화 구경을 종전보다 부쩍 많이 다니는 형편이지만 그것도 직책에 얽매어 의무적으로 보게되니 오락이기보다 오히려 고통이 될 때가 많다.
그래서 그런지 문공부 안의 영사실에서 본 영화들은 개봉관이나 개봉전야의 시사실 같은데서 볼 때보다 활실히 인상적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그동안에 감상한 영화(방화) 가운데서 내가 특히 좋다고 생각한 작품이나 감동을 받은 화면에 대해서 이야기하기엔 적합하지 않다.
다만 내가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전체적인 경향이나 문젯점에 대해서 내 나름대로이 몇가지 소감을 피력하는 정도다.
내가 그동안에 본 문예영화는 <李霜의 날개> <카인의 後裔> <被害者> <始發点> <將軍의 수염> <당신> <봄 · 봄> <나도 人間이 되련다> <장미의 城> 등인데, 끝으머리의 <나도 人間이 되련다> <장미의 城> 두편은 原作이 戱曲이고 그다음은 전부가 小說이다. (以上 九篇中 六篇은 과거에 이미 보았던 것을 다시 본 것이다. )
문예영화들을 보고 내가 전체적으로 불만을 느낀것은 각색(씨나리오)이나 연줄(감독) 과정에 있어 원작의 주제(主題)를 옳게 살리지 못한 점이다. 이야기 줄거리라든가 분위기 같은 것은 상당히 진지하게(원작에 충실하게) 그려나갔는데도, 관중들에게 그 이야기가 노리는 의미를 전달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어느정도 이름있는 작품(원작)들인 만큼 이야기 줄거리라든가 분위기에 무언가 좀 색다른 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 관중에게 심각한 감동을 주지 못하고 마는 것은 원작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주제를 살리지 못한데 원인이 있다고 본다.
그런데도 우리 영화에 어느 예술적 품격을 푸라스하고 있는 것이 그나마 소위 문예영화라고 볼 수 밖에 없을때, 더욱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이번 우수영화심사에 있어 번안(飜案) 작품은 제외되었다. 문학(창작) 작품에 있어 번안작품이 평가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모방 이상의 모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극 영화의 이 「번안」이란 것을 문학의 경우와 같이 해석할 수 는 없다. 문학의 경우는 번역(飜譯)가 번안이 뚜렷하게 구별된다기 보다 완전히 별개의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연극영화의 경우엔 번역과 번안의 구별이 그렇게 뚜렷할 수 없고(각색과정의 문제로서) 특히 영화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원작이 구미(歐美)의 것일때 우리나라에서 각색을 한다면 원작의 시대(19世紀)와 사회(로서아 또는 佛蘭西 등)를 그대로 옮기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더구나 분장을 그네들 같이 했다간 우스꽝스러운 연극이 되고말 것이다. 따라서 「시츄에이션」을 바꾸게 되고 줄거리엔 그렇지 않아도 의례건 어느정도의 윤색이 필요하므로 결국 번안작품의 형식을 띄지않을 수 없게 된다. 이번에도 「女子의 一生」같은 것이 그러한 케이스로 실격인가 자진취하(自進取下)인가 되었지만 이 문제는 「세미나」 같은 것을 통해서라도 다시한번 검토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셋째로 잠간 언급하고 싶은 것은 영화제작에 있어서의 기획성(企劃性)문제다. 어떤 케이스(스토리의)가 팔린다 하면 비슷한 줄거리를 모두 흉내내려는 경향들이다. 가령 「미워도 다시한번」이 팔린다 하면 비슷한 줄거리들이 꼬리를 물고 쏟아져 나온다. 이런 것은 反共영화의 경우에도 보인다. 우선 소내면(素材面)에 있어 대개 대동소이한 것들 뿐이다. 왜 좀더 다른 각도에서 기획하지 못할까. 실지로 들어가서 일을 해보면 정작 어떨지 모르지만 우선 보는 사람으로서는 아타까울 뿐이다.
김동리(小說家 · 映畵委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