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늦은 꽃 (25) 갈림길 ⑨
발행일1969-06-15 [제673호, 4면]
어머니의 생각이 아주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틀렸다기 보다 전적으로 옳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생각하니 현주는 외국행이 아쉽게 여겨짐을 어쩔 수 없다.
(결혼이라는건 지금 안한더라도 후에 얼마든지 기회가 있으나 외국행은 오직 이 기회뿐 이걸 놓치면 그런기회가…)
이튿날 현주는 Y교수를 그의 댁으로 찾기로 했다. 미리 낮에 학교에 전화연락을 해놓고 저녁에 찾기로 마련해 놓았다.
저녁 후에 찾으니 Y선생 방에는 박훈씨가 와있었다.
(어머…)
현주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Y선생에게 요즘의 사정을 이야기해 그지시를 받고자 했던 참이었다. 물론 박훈씨의 이야기도 숨김없이 나오게 마련인 것이다. 그랬는데 장본인이 와앉아 있다. 현주는 애써 그런 내색을 내지 않으려고 했으나 역시 표정에 나타난 모양
『하하 박 선생이 이 자리에 와 있어 현주군 어리둥절한 모양이군…』
싱글벙글하더니
『막차에서 내렸다구 찾아왔구먼 …차라리 잘됐지 뭐요. 앉아라구…』
평소의 소탈한 성품이 더욱 소탈하게 풍겨지고 있었다. 그래도 현주는 가슴이 두근거리기는 매한가지었으나 그런대로 앉았다. 박훈씨는 훨씬 젊어보였다. 시물시물하면서 현주를 보았으나 자신도 겸연쩍은듯 말이 없다가
『이거 내가 마구 뛰어들어…』
이렇게 말하는 품이 수줍은 청년같았다. 사모님이 차를 가지고 들어와서
『왜 통 놀러오지 않고… 오늘은 마침 박 선생도 멀리서 오셨구… 천천히 놀다가세요』
그러면서 박훈씨와 현주를 번갈아 보았다. 박훈씨가 현주에게 청혼한 사실을 알고 이 자리를 꾸며놓은 것은 아니건만 참 잘되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Y선생이 눈짓을 한 것인가, 사모님은 나가더니 맥주 두병과 땅콩 접시를 들고 들어왔다.
현주는 이자리에 앉아있기 거북한 생각이 들었다.
『저 후일에 다시 찾아뵙겠어요』
일어나려고 했더니
『이게 무슨 말이오』 우선 사모님이 펄쩍 뛰었다.
『뭐 얘기할 일 있나? 얘기해두 좋아』
Y교수는 말하고 나서 불안해 하는 현주를 살피고
『박선생 앞에선 안되겠나? 괜찮아… 말해요』
그리고는 아내가 따라주는 맥주잔을 손님 보다 먼저 들어 반쯤 마시고 잔을 놓으면서 -
『불안하다면 후에 얘기해도 좋고… 어떻든 오늘은 마친 잘됐으니 천천히 앉아 우리 고우(古友)들이 주고받는 얘기나 들으라구…』
명랑하게 말하고
『현주군도 들어보시지…』
현주 앞에 딸아놓으 맥주를 권했다.
『제가요?』
현주의 정말 수줍어하는 태도에 박훈씨가
『맥준걸 들지 뭘 그래요』
역시 권했다.
『못해요』
현주는 저도 모르게 생긋 웃었다.
『들어 입에라도 댔다가 놓아야지』
Y교수가 익살맞게 말했다.
현주는 이젠 새삼스럽게 일어설 수 없었다. 그리고 잔을 들어 정말 입술에만 댔다가 놓았다.
박훈씨와 Y교수는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는듯이 서로 잔을 부어가면서 처음에는 존대말이었으나 차츰 이사람 저사람으로 변했다가 마침내는 이에 저애로… 청소년 시절로 돌아간듯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사모님도 현주 옆에 앉아서 둘은 함께 주인과 손님의 명랑한 태도와 말을 구경하고 듣고 했다. Y교수는 술을 얼마든지 가져오라고 했다. 두병이 또 들어왔다. 그때까지 현주는 사모님과 함께 그 자리에 앉아 있었으나 또 두병을 가져오라고 Y교수가 호령을 했을때에는 방에서 나가는 사모님과 함께 슬그머니 나와버렸다.
『사모님 저 가겠어요』
역시 사모님은 만류했으나 현주는 Y교수 집에서 나오고 말았다.
골목을 천천히 걸어나오면서 현주는 중얼거렸다.
(내일까지 알려달라고 했는데…)
이모와 약속한 일을 생각한 때문이었다.
골목에서 큰길까지는 꾀 긴 거리었다.
방안에 앉아 있을때는 명랑한 분위기 속에서 풀리고 있던 마음이 지금은 다시 침울해지고 갈팡질팡해지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그렇게 혼자 뇌이고 있는데
『현주씨…』
등뒤에서 박훈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놀랄거 없어요』
『더 앉아 계시지 않고…』
술기운이 있는듯 없는듯 박훈씨는 조금도 언동이 흩으러지지 않았다. 말이 없이 현주와 나란히 걷다가
『Y교수로부터 얘기를 들었겠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예』
또 말이 없다가 박훈씨가
『어떻게 생각하시오?』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현주는 대답을 할 수 없어 거저 걷기만 했다.
『이렇게 말하면 쑥쓰럽기 짝이없지마는…』
박훈씨가 뜸을 들였다가 괴롭게 발음했다.
『승낙해 주오…』
역시 현주는 대답이 없다. 또 말없이 걷다가 큰길에 나설 무렵이었다. 박훈씨는 말했다.
『현주 없이는 사는 보람이…』
끝을 채 맺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