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바티깐」 공의회 이후 그리스도교 재일치운동이 세계적으로 점고되고 있는 이때 우리한국교회에서도 느리긴 하나 조심스럽게 화해의 기풍이 진작되어가고 있다.
지난 10월 24일 가톨릭의대 강당에서 열린 서울대교구평신사도협의회 제3차 「세미나」에서 「교회일치와 대화에 관한 문제」란 주제로 가톨릭에서 박양운 신부가 「교회일치운동의 신학」을, 프로테스탄트의 조향록 목사는 「신교의 입장에서 본 교회일치문제」를 강연했다. 여기에 이날 강연을 초해본다.(編輯者 註)
■ 敎會一致運動(교회일치운동)의 神學(신학) / (朴養雲 신부, 종교인협회장서리)
理想的 敎會具現一致의 길, 救援의 對象 ⇨ 모든 人類, 分裂에 責任 따질 수 없어
요한 23세가 소집한 제2차 「바티깐」 공의회의 중요한 목적중의 하나는 분열된 교파간의 대화와 화해를 촉진하는 것이었다.
가톨릭과 동방교회와는 9백년간,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교회와는 4백년간 서로 외면하면서 불목해왔다.
요한 23세는 그가 교황이 되자마자 교회의 분열이란 스캔달을 조속히 청산하기 위해 어떠한 방법을 쓰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는 또한 교파분열 당시에는 하느님대전에 몇 사람이 책임을 졌는지 모르지만 오늘의 가톨릭·프로테스탄트 신자들 중에는 분열에 책임을 질 사람이 아무도 없으며 또 책임을 추궁해야 소용이 없음을 절감하였다.
하느님의 역사에는 후회가 없고 전진만이 있기 때문에 교회분열에 대한 과거의 감정이나 잘잘못을 따져야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일찌기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누가 10·62)』고 말씀하셨다.
사실 요한 23세의 교회일치운동의 방향은 과거를 따지는 것이 아니고 앞날에 있어 서로 가까워지도록 모든 방법을 강구하는데 있다.
그가 내세운 「바티깐」 공의회의 「모또」인 「교회의 현대화」(AGGIORN AMENTO)도 교회를 미래에 있어 이상적인 교회로 만들어 보자는 뜻이 있다.
이 「교회의 현대화」로 가톨릭·프로테스탄트 양측이 모두 미래에 있어 「이상적인 교회」를 구현할 때에 교회는 쉽게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일치운동의 가능성과 그 전망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며 비판을 하는데 그것은 요한 23세의 「교회의 사명」에 대한 넓은 마음을 이해 못하기 때문인 줄 안다.
성당에 나오는 가톨릭신자만을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교회가 위임받은 사명이 아니다. 모든 크리스찬, 더 나아가서 전인류를 다 구원에로 이끄는 것이 교회의 사명임을 요한 23세는 절실히 깨달았다. 그러기 때문에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다른 교파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서로 사랑함으로써 양측의 사이를 좁혀야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 갈라져나간 형제들에게도 구원에 절대 필요한 성세와 신·망·애 3덕을 발할 수 있는 은혜의 생활이 있기 때문에 선의의 많은 형제들이 「하느님 백성」안에서 우리와 같은 신앙생활을 실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교회일치운동이란 비록 교파는 다르다고 하지만 근본이 같기 때문에 같은 형제임을 인식하고 서로 존중하며 이상적인 크리스찬이 되기로 서로 노력하는 「사랑의 운동」인 것이다.
열교는 한둘의 과오가 인간에게 얼마나 피해를 주는 가를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섭리인 것이다.
우리는 형제적 사랑 속에 「모든 과오는 내게」라는 마음가짐으로 우리가 지닌 잘못을 인식하고 혁신의 대열에 서야겠다. 가톨릭은 변하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왔지만 변하지 않는 사상과 제도로 세상을 구원할 수는 없는 것이다.
■ 新敎(신교)에서 본 敎會一致(교회일치) / 조향록 목사, 초동교회
서로가 본받을 長点 內包, 一致위해 가톨릭 더욱 開放해야
아직도 넘어야 할 難關 많아
똑같은 주의 이름으로 구속받은 우리들이지만 나는 천주교회 앞을 지날 때마다 저 안에서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을까하는 생소한 느낌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가끔 이러한 자리를 가질 때마다 오랫동안 대화가 막혔던 형제가 재회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커다란 감격과 기쁨을 느끼게 됨은 다행한 일이라 생각한다.
교회일치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점에 앞서 개신교회가 가톨릭을 보는 일반적인관점을 요약해서 말한다면 먼저 내용과 실제를 깊이 생각치 않고 형식을 고수하는 형식 고수주의자로 보기가 일쑤다. 그것은 변치 않는 사제의 복장에서 잘 나타난다. 또한 신자들의 사고도 전통적인 형식에 대해 매우 의식적인 것 같다.
교회운영 면에서 보면 평신도 한사람 한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몫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사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점에서 사제정치라고 말 할 수 있다.
또한 관용성이 없는 것 같다. 일치문제를 놓고 볼때 가톨릭은 갈라져나간 형제들을 자기 안에 불러 모으는 것이 일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예수님은 지존의 위치에서 인간의 몸을 취하고 세상에 오셨거늘 가톨릭은 예수님보다 조금 더 높게 단단하게 벽을 쌓고 문을 조금만 열어놓고 그 안에 모두 들어오기를 원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에 이르러 제2차 「바티깐」 공의회 이후 일치문제가 대두되고부터는 개신교와 같이 사회와 이웃을 위해 일하는 기회가 점차 늘어나고 있지만 근세에 들어와 상당한 시일을 고립 속에서 지내왔던 것은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톨릭은 의식적인 고립주의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이러한 부정적인 면은 있지만, 가까이 접근해서 대화를 나누어보면 개신교에서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그리스도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개신교의 절도 없고 무질서한 기도생활에 대해 전통적인 가톨릭교회가 지닌 영적인 기도의 규범을 개신교 지도자의 입장에서 많이 도입하고 권장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사회봉사면에서 보면 개신교 안에도 그리스도적 사랑으로 훌륭한 봉사를 한 많은 이들을 발견하나 가톨릭의 적극적이고 자기희생의 봉사를 볼 때마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표면적으로 상이하나 한 그리스도의 교회임을 시인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두개의 교회가 완전히 하나로 되기에는 넘어야 할 문제점들이 있는 것이다.
첫째 일치의 근거를 어디에 두느냐 하는 점이다. 개개인의 신도가 자유롭게 성령을 통해 받은 은혜와 구속에 대한 확신속에 고백된 신앙을 통한 일치인가 아니면 제도와 전통과 규범과 권유와 거기에 따른 수동적인 자세와 굴종적인 관계 속에 이루어지는 일치인가 하는 문제이다.
마리아 문제에 있어 예수를 잉태한 동정녀로서 그 높음과 신앙과 헌신과 봉사는 모든 성인들 앞자리에 서기에 합당하겠으나 그가 예수의 모친이라 해도 하느님 앞에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요, 인간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하늘과 땅 사이에 다리를 놓을 인간으로서의 존재는 없다고 생각한다.
성찬문제에 있어 성찬을 단지 하나의 순수한 기념이요, 상징적인 것으로만 물체화시킬때,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보편화시킨다는 점에서, 의미상의 차이는 있으나 개신교에서 최근에 이르러 성찬의 의식을 권장하고 있다.
실체화한다는 가톨릭의 견해에 대해 개신교는 빵과 포도주가 물체적인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보다 이것이 살이요, 피라는 신앙적인 영적인 고백이 그 빵과 술을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일치화 시킨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교황의 수위권문제에 있어 가톨릭의 제도상 보이는 교회의 보이는 수장으로서의 위치이며, 성직은 교회 안에서 직능상으로 받은 은총에 불과한 것이다. 만인은 누구나 하느님 앞에 은총을 빌수가 있다.
그러므로 교황은 가톨릭 안에서의 위치일뿐 모든 교회의 수장은 될 수 없다고 본다.
끝으로 독신제도를 부인하지는 않으나 괴롭고 쓰라린 인간본연의 내면생활을 깊숙히 통찰치 못함으로 저지를 수 있는 위험을 생각치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도 한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인간의 생활을 영위하셨고 무덤에 묻히셨음은 인간역사에 참여하여 그들 속에 호흡함으로 구원의 손길을 고르게 펴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