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救世史(구세사) 교실] ⑰ 聖祖史記(성조사기) ⑦ 하느님의 벗과 「소돔」의 멸망
소돔의 敎訓(교훈)
破壞(파괴) 아닌 完成段階(완성단계)
傳求(전구)의 限界(한계)도 暗示(암시)
발행일1969-06-22 [제674호, 2면]
이스라엘의 오랜 傳承은 아브라함을 「하느님의 벗」이라 전해왔다. 가까운 벗끼리는 서로 아끼고 자주 왕래하며 각자의 생각이나 계획을 기탄없이 털어놓고 또 상대방의 소원을 성취시켜주려고 애쓰는 법이다.
신비로운 「세 어른」(하느님과 두 천사)의 아브라함 방문 이야기는(창세 18장)이 傳承을 뒷받침하는 민간설화이다.
다신교의 擬人的인 표현법을 빌어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親交」를 인상적으로 劇化한 이 說話의 시대적 배경에는 生面不知의 손님이라도 정중히 대접하던 당시의 생활미풍이 반영되어있다. (오늘날에도 아라비아인들은 이 풍습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세 어른을 융숭히 대접한 「거룩한 식사중에」 嫡子의 탄생을 거듭 약속된 것으로 묘사하고 있고 또 이 약속은 후에 어김없이 실현되었다고 했다. 이 散文이 가르치고 있는 바를 시편 作家는 이렇게 요약하였다. 『주는 당신께 의탁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을, 사람들 보는 앞에서 베푸시나이다』(시 30·20) 우리는 이 說話와 우리 주 예수께서 친히 레비(마테오)를 찾으시고 자케오의 집에 들르시고 「베타니아」의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를 방문하셨다는 복음의 보고를 관련시켜 묵상하고 사도 바오로의 다음 말씀을 귀담아들어야 한다.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이사악과 같이 약속의 아들입니다』(갈라 4·28)
이야기의 무대는 「소돔」으로 옮겨진다. 아브라함은 여러민족의 선조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역사의 사건들에도 介入해야했다.
그래서 성경 저자는 「소돔」의 이야기를 통해 아브라함의 性格像에 「예언자」라는 새로운 측면을 첨가하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에 예언자란 하느님이 당신의 救世 계획에 관여시키는 사람들이었다. 즉 『주 야훼께서는 당신의 비밀을 그 종인 예언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그대로 행하시는 일이 없으시다』(아모 3·7)고 했다. 요컨대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당신의 심판계획에 참여시키는 「플로트」를 통해 성경 저자는 자기시대 사람들뿐 아니라 후대 사람들로 하여금 이 地上에 公平과 正義를 具現하시는 심판자(하느님)를 두려워하게 하려고 했다.
아브라함이 「소돔」의 운명에 관해 야훼와 담판하는 이야기는 사람이 다른 이를 위해 어느 한도까지 빌어줄 수 있는가 즉 傳求의 極限을 形象化하고 참된 정신적 度量을 가르치고 있는 중요한 啓示證言이다.
고대 근동에서 손님 대접은 하나의 신성한 종교적 의무로 간주되었다.
로트는 비록 얕은 소견에서 현세적 便宣를 찾아 惡의 도시에 자리잡고 살았으나(창세 13·10 참조) 이 의무를 잊지 않고 자기를 찾은 두 손님(천사)을 융숭히 대접했다. 그러나 「소돔」 사람들은 대접 커녕 두 손님을 男色의 상대로 삼으려고 설치었다. 문자 그대로 저주받을 죄이다.
우리는 이 손님대접 이야기에 力点을 둔 성경 저자의 의도를 깊이 헤아려야 한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다음가 같이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너희말을 듣지도 않거든 그 집이나 그 도시를 떠날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라. 내가 진정으로 말하거니와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도시보다는 견디기 쉬울 것이다.』 신앙을 모르는 사람은 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야기」를 자연적 災變의 종교적 脚色으로만 보겠지만 적어도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이 說話에서 하느님의 심판에 관한 계시증언을 들으며 시편 作者와 함게 이렇게 고백해야 할 것이다. 『주께서 오시나니 세상을 다스리러 오시나니 당신은 온세상을 정의로 다스리시리라 공평하게 백성들을 다스리시리라』(시 97·9). 신약의 묵시록에는 천지가 뒤범벅이 되는듯한 세말적 사건들을 數理的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세상의 종말을 고하는 무서운 急變들이 아무렇게나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서 진행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묵시록에서 天變地異는 파괴와 멸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완성(하느님의 나라)과 관련해서 고찰되고 있다. 그리스도교회는 다가올 아니 이미 다가온 주님의 來臨으로 해서 심판과 함께 구원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마지막때」란 바로 「지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새로운 啓示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현재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啓示의 完成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신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終末論的 待臨의 자세는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