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제)2回(회)「나이팅게일記章(기장)」받은 권석혜 여사를 찾아서
“이 榮光(영광)을 하느님께”
犧牲(희생)·奉仕(봉사)·博愛(박애)의 半平生(반평생)
어릴 때 나이팅게일 傳記(전기)읽고 感動(감동)
요즈음 看護員(간호원)은 너무 타산적
患者(환자)치료에 熱(열)과 誠(성)다해야
남은餘生(여생) 看護事業(간호사업)에 바칠 覺悟(각오)
지난 10월 27일 서울 「드라마센타」에서 거행된 대한적십자사 창립 20주년기념식에서는 「제네바」 세계적십자사의 제22회 플로렌스·나이팅게일기장이 정일권 국무총리에 의해 권석혜씨(대구대학병원 간호과장) 유순한씨(국립의료원 간호과장)에게 수여되었다. 이 영예의 주인공을 찾아 편집자는 권석혜씨가 근무하는 대학병원 2층 간호과장실을 「노크」했다.
『그땐 지난 34년간 간호사업에 몸바쳐 오면서 겪었던 일들이 하나하나 머리를 스쳐가더군요. 벅찬 감격으로 그저 눈시울이 뜨거워 졌읍니다.』
간호원으로서는 최고영예인 「나이팅게일기장」을 수여받았을 때의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권 여사는 지금도 그때의 그 감격스러웠던 장면이 생각나는 듯 상기되면서 말한다.
과히 크지 않은 키에다 겪어온 숱한 역경들을 말해주는 듯 주름진 얼굴에 안경 너머로 반짝이는 두 눈이 적으나 이지적이다.
지금으로부터 7년전 안동權씨의 명문가정에서 태어난 權여사는 어렸을 적에 아버지가 사다준 「나이팅게일 전기」를 읽고 크게 감동 간호원직을 동경하며 자라오다가 세브란스의전 부속간호학교 입학시험에 합격됨으로써 어렸을 적의 꿈을 실현할 수 있었다고 아득히 먼 옛일을 더듬었다.
간호학교 시절엔 엄격한 분위기 속에서 철저한 교육을 받았기에 졸업 후 첫 근무지였던 안동 성소병원에서는 수술때면 원장이 선배 간호원들을 제쳐놓고 이 병아리간호원을 찾았다고 한다.
『성소병원을 출발점으로 해서 제가 간호사업에 몸담은 지 어언 35년이란 세월이 흘렀읍니다.
그러니까 저의 반평생을 고스란히 이 「까운」 속에 묻혀 살아온 셈이죠』라고 말하면서 그 당시만 해도 간호원들에 대한 사회인들의 인식이 부족하여 서러움도 많이 맛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권 여사는 이러한 주위의 분위기에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오직 희생 봉사 박애의 나이팅게일 정신에 따라 개척자적인 정신으로 꿋꿋이 일에만 전념해왔다고 한다.
다행히 선배 간호원들이 이렇게 노력한 보람이 있어 『요즈음은 간호원들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크게 달라진 것이 무엇보다 반가운 일』이라고 기뻐한다.
평양기독병원 대구동산기독병원을 거쳐 1946년 이곳 대학병원으로 온 權 여사는 현재 간호과장으로서의 중책을 맡고 있는데 재직 중 제일 잊을 수 없는 일은 10·1사건 때 밀어닥치는 부상자들 치료에 밤잠을 못자면서 병실을 뛰어 다니던 일이라고 한다.
그때 애써서 치료해 놓은 부상자들을 폭도들이 병원에까지 와서 무차별로 학살, 대학병원정원을 선혈로 물들였다고 하면서 『이는 국제적십자정신에서 볼 때 도저히 용납 못할 만행』이라고 분개했다.
중환자가 성의를 다해 간호해준 보람으로 완치되어 병원문을 나서는 것을 볼 때 간호원으로서 제일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하면서 요즈음 간호원들은 너무 타산적인 생각으로 대우 좋은 곳만을 찾아 이동해가는 경향이 많다고 지적하고 『항상 나이팅게일 정신을 염두에 두고 원칙적인 간호정신에 입각, 환자들의 치료에 열과 성을 다 해 달라』고 후진들에게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또 부산에서 있었던 간호원 김영자양의 구속사건에 대하여는 간호원과 의사가 서로 협조하여 처리했어야 될 일을 전국적인 문제로까지 확대시켰다고 하면서 간호원은 실무에서의 일도 물론 잘해야 하지만 주위사람들과의 상호융화에도 항상 노력해야 된다고 하면서 의사와 간호원사이의 원만한 인간관계를 아쉬워했다.
목사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나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權 여사는 교회일치운동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여 『평신자로서 깊은 내용은 잘 모르지만 다같이 하느님을 모시는 한 형제들이니까 당연히 서로 다시 뭉쳐야 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일찍 남편을 사별하고 세 아들의 뒷바라지에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어려움도 많았다고 하면서 이 복잡했던 가정문제를 극복하고 험난했던 간호원으로서의 길을 무사히 넘어 오늘의 영광을 차지하게된 것은 『오직 하님의 도우심의 결과』라고 모든 영광을 하느님께 돌렸다.
환자들 속에서 살아온 반평생이기에 이제는 사복보다도 흰 「까운」을 입었을 적이 훨씬 더 편하고 『병원이 마치 내집같이 생각된다』는 權 여사는 『내가 걸어온 이 길을 조금도 후회는 않읍니다』고 담담히 말했다.
『앞으로도 힘이 자라는 데까지 여생을 이 간호사업에 바칠 각오입니다』라고 말하는 老백의의 천사의 가슴에는 금빛 나이팅게일기장이 유난히도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