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藝時評(문예시평)] 「유다行傳(행전)」의 失敗(실패)
人間肉身(인간육신) 지닌 그리스도 그려
벅찬 主題(주제), 當爲(당위) · 動機(동기)의 不足(부족)
라게르크비스트의 「바라바」와 흡사한 素材(소재)
현대작가가 바이블에서 소재를 잡아 소설을 쓴 예들이 가끔있어 왔다. 외국의 예로는 스웨덴의 페르 라게르크비스트가 1950년에 쓴 「바라바」가 이런유의 소설로서 이채로왔고 이 소설은 1951년에 노오벨문학상까지 받았다. 문학이 聖書에서 題材를 취해 내올때 그 동기와 處理上의 當爲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종교적인 차원의 문제를 보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리얼리티로 공감하고자 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바라바」는 두드러지게 성공한 소설이었다. 바라바는 누구나 잘 아다시피 그리스도 대신으로 특사를 받아 십자가의 처형으로부터 풀려난 살인강도다.
그러면 작가 라게르크비스트는 바라바의 문제를 어떻게 잡아서 어떻게 처리했나. 인간 바라바는 험악한 사회의 뒷골목에서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생명처럼 태어나 천애의 고아로 자라나면서 오직 무지와 단순과 혈기만으로 생활을 영위한 무뢰한. 때문에 그에게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죄목이 붙어있다.
그러나 그가 역시 운명악의 채찍에 몰려 노예 수용소에서 기독교신자인 한 노예와 같은 사슬로 발을 묶였을 때, 바라바는 단순에서 움트는 의리, 의리에서 움트는 양심, 양심으로 조명하여 물의와 정의의 편을 식별할 수 있는 눈을 뜨게 된다. 그리하여 한 사슬에 묶였던 동료가 또한 십자가 위에 매달릴 때 바라바는 숲속에 숨어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며 지난날 그리스도 대신으로 십자가에서 풀려날 때의 환희와는 반대로 연민과 비통의 감정으로 신음하게 된다.
이와같은 소설의 처리는 인간은 누구도 죄인일 수 있고, 누구도 근원적으로 고독하며, 누구도 결국에는 조용히 가라앉은 가슴과 맑아진 예지의 눈망울로써 자신의 삶을 관조하여 신비롭게 영혼의 승화를 이룰 수 있는 점을 실감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원리는 현대인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문제인 것이다.
「現代文學」 6월호에서 劉賢鍾의 소설 「유다行傳」을 읽고나서 나는 이 소설이 라게르크비스트의 「바라바」와 아주 비슷한 구성을 이루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유다는 노새를 타고 羊皮장수를 다니는 아버지에 의지해 자라났을뿐 그 어머니를 모른다. 유다의 아버지는 결국 이스라엘 민족의 독립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로마」 병사들에게 맞아 죽고, 유다는 고독한 소년으로 자라났다. 그 유다는 아버지가 생전에 중얼거리던 단 한마디 말을 강렬하게 기억한다.
『언젠가는 오리라. 선지자들이 예언한 인자는 오리라. 그이는 모세보다 훌륭한 권능으로 우리를 구원하리라.』
그리하여 유다는 그리스도의 출현에 더없이 흥분하여 그를 따른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영웅적인 혁명가로서 행동해 주지 않았다. 『케에자르의 것은 케에자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들리라.』는 그리스도의 판단에 불만을 느낀다. 피정복자, 즉 우리의 피땀을 긁어 만든 돈을 그 정복자에게 당연하다는 심경으로 주어야 옳은가? 이것은 안이한 도피적 궤변이다. 유다는 이렇게 생각한다. 유다는 그리스도에게 걸었던 기대와 야심이 무너져 나아갈 때 마음 속에 독소가 스며들게 된다. 그는 일종의 반발심리와 짜증으로 그리스도를 관청에 고발하고 체포에 앞장선다 그러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그는 그리스도의 영웅적인 능력을 기대하는 이율배반 속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골고다」 언덕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고는 절망하여 쓰러진다.
이 소설적 처리에서 작가는 유다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는 순간 옛 희랍 율리씨즈의 얼굴을 떠올리게 했다. 어디까지나 인간의 육신을 지닌 인자의 최후의 선두를 의미하고 싶은 것이 작가의 의도였을까? 그랬다면 한때 유다가 목격한 것으로 되어 있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그리스도가 행한 기적은 소설에서 차라리 제거되어 있어야 좋았을 것이다. 성급한 세속적 야심가인 유다의 인류적인 영혼의 주재자인 그리스도 사이에 개재하는 대립적 차원의 갈등이 아마도 이 소설의 선명한 主題여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갈등을 통한 인간의 구원이 납득의 힘을 지닌 암시로 마련되어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가지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이 소설은 선명한 當爲를 지니고 있지 못하였다. 이것은 작가 자신의 정신적인 폭과 깊이가 이 주제를 감당하기에 벅찼던 결과일 것이다.
具仲書(文學評論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