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늦은 꽃 (26) 갈림길 ⑩
발행일1969-06-22 [제674호, 4면]
박훈씨의 적극적인 태도가 현주의 마음 속에 짙은 그림자를 남겨주었다.
그것은 최호진군의 젊은이답지 않은 세련된 신중한 태도 보다도 훨씬 현주에게 고민을 심어주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을 깊게 생각할 여유도 없이 이모는 독촉을 하고 있었다.
『어쩔테냐?』
사흘이 되던날 이모는 집으로 현주를 찾아와 마치 빚받이를 하는 것처럼 말했다.
어머니가 현주 대신 대답했다.
『내 생각에는 서양이구 외국이구 집어치우구 시집이나 갔음 좋겠는데…』
이모가 채권자 같은 태도와는 달리 『언니 생각 노상 글른 것두 아니얘요. 그러나 신랑감은 거기가면 더 좋은게 있다는 사실두 감안해야해요.』
감안(勘案)이란 흔히 씌어지지 않는 낱말을 써가면서 말하다가
『혹 상대자는 있나요? 좋아하는 청년 말이에요?』
역시 현주를 향해서가 아니고 현주 모친을 대해서 묻는다.
『찾아오는 청년이 없는것두 아니지마는…』
『아니얘요』
어머니가 최호진을 지목해 하는 말임을 알고 현주는 순간 짜증섞인 소리를 냈다.
『뭐가 아니냐?』
이모가 이번엔 현주를 향했다.
『내 친구의 약혼자의 친구가 하나 있어요. 약간 싱겁기두한 그 청년이 한번 집에 왔거든요. 엄마 그사람 무척 마음에 드는 모양이얘요. 당장 사위라도 된듯이 말하지 뭐얘요.』
현주의 말에 이모는
『으응, 그래 너는 싫다는 말인가?』
오금박듯 물었다.
『그런 청년?』
『싫다는 말이구나.』
이렇게 말하다가 이모는
『그러나 달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두 있는거냐?』
따지듯 묻는거다. 현주는 순간 박훈씨의 모습이 떠올랐으나 이 마당에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으리만큼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없다면 이번 기회같은 건 너에겐 다시 없어요』
이모는 기회론(機會論)을 또 펼칠 기세였다.
『너를 올드미스나 일생 독신녀로 늙게하자는게 아니야. 연분은 오히려 거기 감으로 해서 맺어질 수 있거든… 출세의 기회고, 좋은 서방 맞을 수 있는 기회구…』
이모는 순품에 돛을 단 배같은 자신의 생애에서 얻은 낙관적인 인생관을 이때에도 강력하게 주장하고
『너같은 엉거주춤하는 얘는 옆에서 끌구나가야 해…승낙한거루 알구 가겠다』
그리고 가버렸다. 현주는 굳이 그걸 마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뭏든 자신이 마음으로 결정을 지어 놓지 않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현주는 또 Y교수를 그의 자택으로 찾았다.
『하하, 요전엔 현주군에게 실례나 되지 않았는지…』
Y교수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하고
『그래 어떤가? 이젠 박형의 프로포즈에 대해 확답을 할 수 있겠지?』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이때가 위기라고 생각하고 현주는
『그것보다두 의논하러왔어요』
마음을 가누어 잡고 말을 했다.
『의논?』
Y교수는 눈을 크게 뜨고 담배를 붙였다.
『외국에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됐어요.』
『뭐?』
Y교수는 현주 앞에 닥아 앉으면서
『어떤 케이슨데?』
뜻밖이라는 듯이 현주의 얼굴을 본다.
현주는 대강 이야기했다.
『아하, 그런 케이스… 아주 좋은 케이스군…』
Y교수는 눈을 껌벅껌벅 하다가 담배를 끄고
『그러니까 간다는 거겠군. 그것두 괜찮겠지… 박훈의 가슴속에 아름다운 상처를 남겨놓는건 안됐지마는… 그러나… 뭐… 자네는 아직 젊으니까…』
서글프다고 할 수 있으리만큼 가라앉은 어조였다.
현주는
(역시 가는 거다.)
길게 Y교수와 이야기를 주고 받지 않았으나 Y교수의 심중을 대뜸 짐작할 수 있었다.
Y교수집에서 나오던 길에 현주는 이모집으로 발을 돌렸다.
『왔구나. 그제 결심했나?』
이모는 역시 현주를 데리고 가는 일에 집착하고 잇었다.
『이모 좋두룩 해주어요.』
『이모가 좋은게 아니라 네가 좋은거다…』
현주의 마음은 이제 외곬으로 잡혀지고 있었다.
최호진과 약속한날. 둘은 최호진이 미리 예약해둔 관광뻐스를 타고 남한산성으로 갔다.
마음을 잡아서 그런지 현주는 전에 없이 명랑했고 오히려 최호진보다도 말수가 많았다. 그게 최호진으로서는 무척 흐믓한 일이었다.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결혼해주었으면…』
마침내 마음속을 털어놓았다.
『결혼요?』 현주는 되뇌이고
『그러고는 싶으나 떠나게 될 것 같얘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