現代的(현대적) 死神論(사신론)과 對決(대결)하는 敎會(교회)의 神(신)의 證人(증인)들 ㊦
빛 있어도 눈감아
現代(현대)의 文學(문학), 神(신)이 침묵한다고 神(신)의 人間的(인간적)인 認識(인식)은 不可(불가)
이 살아있는 목소리가 생소하게 느껴져 오래가지 못하리라고 예견하는 자들이 있지만 실상 그것은 현대적 不信 · 후기 기독교신앙 · 현대철학적 허무주의의 모호한 신학과 같은 꼴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그것이 진리와 생명의 부르심에 불충실한, 약간 인간적인 것에서 일어난 것일지라도 세상 마칠때까지 그의 교회를 보장하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는 이 불길한 예언에 놀라지 않습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우리의 종교적인 「메시지」를 인류에게 전달하기가 점점 어려워 진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오늘날의 인간이 과거보다 종교적인 이념이나 생활에 호의를 풀고 있지 않습니다.
존재하기를 그친 것은 신의 현실이 아니고 오늘날의 인간의 두뇌가 신의 비춤과 소리를 잡으려는 경향이 적어진 것입니다.
현대인은 과거사람보다 하느님의 신비와 접촉하는데 필요와 소질을 더 가지고 잇으나 이 필요하고 피할 수 없는 신비를 맞이하고 받아들이는데는 재간이 더 적습니다. 왜냐하면 연구와 관찰의 영역을 넓히고 감각적 경험의 분야를 어마어마하게 확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이 확장되고 어마어마한 사고와 감각의 지배가 인간의 양심에 결정적인 순간이 주어지면 - 현실의 본질적 요구에 따라, 그리고 확장된 범위의 문제한계선에 따라 - 절대적인 지식과 경험에 대한 갈망을 일으킨다 할지라도 현대인은 과학적으로 그리고 감각을 통해서 아는 것만으로 만족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물을 것입니다. 교회의 종교적 가르침과 현대의 불신적 세계 아이에 여러분들이 주장하는 신에 대한 영원하고 정복되지 않는 확신과 금세기의 회의와 종교적 부정사이에, 신에 대한 이성적 계시적 믿음과 이 시대의 무신론 - 수사학적이든 실질적이든 - 사이에 없앨 수 없는 不一致가 존재하느냐?고.
그렇습니다. 모순이, 아니 아마도 더 정확하게 말해서 정반대가 교리속에 존재합니다.
오늘날의 정신적 드라마와 역사적 정치적 드라마가 생기는 것은 정확하게 바로 이 정반대 위에서입니다.
교리는 그들끼리 융화되기 어렵고 이념은 오늘날 모두가 그렇듯 급진적으로 달라집니다.
그러나 완벽하고 이해받는 진리는 단하나 뿐입니다.
말하자면 토의 - 대화 - 는 가능합니다. 허위와 불완전한 관념의 전개는 관념자체의 내적 논리 속에, 그리고 그것을 고백하는 마음의 깊은 요구 속에 놓여있읍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 성 바오로의 말씀(테쌀로니까전서 5장5절)과 같이 여러분들을 밤과 어두움의 자녀가 아니라 낮과 광명의 자녀라 부르고 싶습니다. - 우리는 『천주께서는 숨어계신다』(이사야 45장15절)는 근본적이고도 기본적인 사실을 기억해야만 되겠읍니다. 우리에게 말해주고 우리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천주현존이 문턱까지 이끌어주는 징표와 길과 소리와 자극은 많습니다.
그러나 이 현세생활에서는 『다만 거울을 통하여 어슴프레하게(꼬린토전서 13장 12절) 신비 속에서 반영으로 천주를 보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이성적 지식은 비록 준엄하긴 하나 단순한 사고의 훈련을 要하는 증거라는 수단에 의해서 존재하며 유한성을 부정하고 완전성을 승화시키지 않고는 그분께 도달하지 못합니다.
우리와 언젠가 주의 무한한 진리에 대해 가지고 싶어하는 직접적이고 복된 「對面」을 아직 차지하진 못했지만 신앙을 통해서 된것은 더욱 꽉차고 더욱 확인되고 더 생생해집니다.
현대문학은 신이 침묵을 지킨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자연적인 귀에는 침묵을 지키는듯 신의 말씀이 들리지 않으나 그분은 다만 다른 방법으로 자기를 찾고 듣도록 할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주께 대한 지식을 즐길 첫째의무와 그분이 자기를 보도록 허락하는 장소와 방법과 시간을 따라 열심히 그분을 찾아야 할 둘째 의무와 맞서게 됩니다.
이것이 빛을 기다리며 지키는 밤새움 즉 현세생활의 심오한 의미입니다.
이것에 이르도록 여러분을 강복하며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