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年(년)의 발자취] 本堂(본당)·敎會機關(교회기관) 어제와 오늘 ② 桂山本堂(계산본당)
嶺南地方(영남지방) 宣敎(선교)의 根據地(근거지)
初代會長(초대회장)들 開拓精神(개척정신) 充溢(충일)
발행일1969-06-29 [제675호, 3면]
대구대교구의 주교좌인 계산동 대성당은 명실공히 영남포교의 중심본당으로 그 역사와 전통이 알려지고 있다.
1886년 제7대 교구장인 白 주교가 대구본당을 설정하고 초대본당 주임으로 불란서 사람, 김 바오로 신부를 임명하여 대구지방을 담당케 하였으니 실은 경상남북도 전역을 선교지역으로 담당케 한 것이다.
그러나 김 신부의 부임은 정처없는 부임이였다. 병인교난이 종식되었다 하지만 아직 지방적으로는 사군란(私군難)이 계속되고 있는 때라 대구읍성 내외의 감시가 심했고 주민들의 질시는 극심하여 외국인으로서 활동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김 신부는 먼저 읍내에서 멀리 떨어진 신나무골(현 被川역과 新洞사이)에서 3년간 은신 전교하다가 1888년 겨울 새방골(現시내 上里洞)로 옮겨 또 3년간 은신전교했다.
이때 김 신부는 당시 경상감사 민정식을 걸어 1886년에 체결된 한불우호조약 위약을 한국정부에 항의 민 감사를 파면케 한 사건은 천주교에 대한 일반의 인식전환과 포교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1891년 김 신부는 읍내로 들어와 대야불(現 人橋洞) 정규옥(鄭圭옥) 승지댁에서 7년동안 전교하면서 영구적인 성당 건립을 위해 부지를 물색 현 계산동 위치를 택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처음 계획은 성당 건너편 동산전부를 1백50량에 사기로 결정되었으나 일부 노인층의 완강한 반대의견 때문에 상당한 시일을 두고 논의되었으나 결국 현위치로 낙착된 것이다. 이것은 몇몇 사람의 백년대계를 대다보지 못한 근시안적 판단이 아닐 수 없다. 1897년 봄에 대야불 임시성당에서 계산동으로 옮겨 3년만인 1899년 봄에 한식목조십자형성당을 신축낙성하였다. 그러나 그이듬해(1900년) 에 불의의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김 신부는 교회중진인 서상돈 · 김종학 · 정규옥 제씨의 협력으로 1902년 5월말에 서양식 벽돌성당을 준공하였으니 당시 대구에서는 처음 보는 가장 웅장하고 높은 건물로 「뾰족집」이란 별명을 갖게되었다. 성당문에는 성모성당이란 뜻에서 성모당이란 현판을 먼저 달았다. 외교인들의 곡해우려가 있어 천주당으로 바꾸었다.
1911년경에는 본당 신자수가 3천여명에 달하게 되어 성당을 증축하지 않을 수 없어 고심하던중 김종학 한윤화 제씨의 협조로 1918년 12월 24일 증축준공하니 이것이 현대성당의 모습이다. 현재 신자는 6천3백여명이다. 또한 교회초창기에 활약한 김 신부와 더불어 지대한 공적을 남겼고 애덕을 실천한 김옥현(金玉賢) 회장과 서상돈(徐상돈)씨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김 회장은 평생을 동정으로 지내면서 김 신부를 보좌하여 본당발전을 위해 온갖 각고를 겪었으며 기미흉년에는 길에 쓸어진 노파나 어린이들을 집에 데려다 수용구호한 수가 수십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의 임종시에는 5일번부터 매일 午時와 子正에 어디서 들려오는지 아름다운 풍류소리와 좋은 향기가 풍겨왔으며 그의 이마에는 붉은 십자가가 나타나고 얼굴과 전신에는 교난때 매맞은 흔상(傷痕)이 나타났다고 한다.
또한 서상돈(아우구스띠노)씨는 대구금융실업계 중진으로 과거 경상도시찰관도 역임한 소박하고도 결한 품성과 가난한 자를 돕는 자선가이기도 하다. 판공때 천주를 왜 믿느냐는 질문에 『서시찰 논부치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나올 정도로 신자들을 도왔으며 선생 자신도 열심수계했다고 한다. 그리고 계산동본당은 평신자활동과 육영사업의 중심이기도 했다.
성당부속건물로 해성제(海星齊)를 짓고 한문글방을 개설(1899년)하였으니 이것이 대구교구 교육기관의 효시가 되었다.
또한 해성제는 학원 · 회관 · 집회소로 널리 활용되었는데 해성국민학교와 효성국민학교의 전인 성립학교가 여기서 발상되었고, 효성유치원과 해성여자학원(1980년)이 설립당시부터 교사로 사용하였으며 해성체육단(1915년)과 청년회(1920년) 성문회)1921년) 인애회(1917년) 친애회(1917년) 해성악대(1924년) 등 수많은 평신자 활동단체의 집회장으로 이용되었다.
본당발전을 위해 1937년 전교회를 조직, 사목활동을 보좌했고 1934년에도 본당 평의회를 조직, 교회유지 · 운영에 관한 모든 중요사항을 의결했다.
이 평의회는 오늘날 운영위원회와 같은 성질의 것으로 전국 어느본당보다 먼저 조직된 셈이다.
그리고 본당신자 수가 날로 늘어남에 따라 비산 · 대명 · 삼덕 · 신암 · 남산 · 범어 · 대봉 · 내당 · 칠성 · 대안 등 새 본당을 설정, 분가시켰다.
해방 이후를 살펴보면 가톨릭성가대와 가톨릭청년회 활동이 활발했으며 개화운동의 전위역할을 해왔다.
6·25때는 가톨릭청년회 소속 학생들은 군에 지원입대하고 일반 청년들은 의용대를 조직, 피난민 구호대책을 세워 구호작업을 수행했다.
한편 본당건물도 군사주둔지역으로 징발(?)되어 국가위난을 함께 겪었으니 1945년 봄에는 일본군이, 그리고 1·4후퇴 직후부터 육군본부가 서울로 옮겨갈때까지는 국방부 정훈국이 현 유치원자리에 주둔해 왔었다. 또한 해성학교는 9·28수복때까지 전쟁포로수용소로 사용되었다.
계산동본당의 특성이라면 새로운 사조를 남먼저 받아들여 평신도활동을 전개한 것과 느리지만 경상도 표본인양 끈질긴 운영이다. 그러나 세대교체가 어려운 고루한 면도 없지 않다. 특히 전례개혁에는 본당신부들의 고심도 많았다. 13대 본당주임인 박상태(루도비꼬) 신부가 1957년 5월 1일 부임하여 12년간 5천여명을 영세시켰고 주교좌본당으로서 면모 유지에 최선을 다했음과 효성국민학교와 유치원을 전국 유수의 학교로 육성하고 「레지오」 활동을 57년 2월에 대구서 처음으로 시작 현재 「꼬미시움」과 소년 「꾸리아」 등 「쁘레시디움」은 20여개가 된다. 또한 JOC, 연령회, 성모회, 부인회 등 수많은 단체들을 지도하고 있다.
역대주임신부
1대 김 바오로 신부(佛人) 1886~1919
2대 張약설 신부(〃) 1919~1931
3대 白鶴老 〃(〃) 1931~1931
4대 權裕良 〃(〃) 1931~1939
5대 李 리샬 〃(〃) 1939~1940
6대 金賢培 〃 1940~1942
7대 金厚生 〃1942~1942
8대 徐廷道 〃1942~1944
9대 朴在秀 〃 1944~1948
10대 徐正吉 〃 1948~1954
11대 李哲熙 〃 1954~1955
12대 治再善 〃 1955~1957
13대 朴相泰 〃 1957~현재
【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