信仰이 서로 다른 가족이 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피차간 이해와 협조와 인간적인 의무와 良識을 지켜야 할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가톨릭신자는 使徒職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음은 양주동 박사와 그 子婦 마주해 여사(故馬海松氏 따님)의 家庭과 종교에 대한 實際 生活 談을 듣는다. (편집자 주)
■ 共通된 信仰으로 不信一掃 / 양주동(예술원종신회원 文學博士)
「감사와 기도」의 자세 人間家族의 本然
이상적인 가정은 말할 것도 없이 「단란·화락」한 가정 곧 이른바 「홈, 스윗홈」인데 그 SWEET란 형용사는 다만 조석 식탁주변의 「향긋」한 꽃냄새, 主婦 마누라의 국솜씨의 「구수」한 맛만이 아니다.
그것은 육친간에 끊임없이 교환되는 「달콤」한 「키스」의 뜻으로 풀이 될 것이 아니요,
근본적으로 「흐뭇」한 깊은 「사랑」 곧 현실적으로 ①가족 成員간의 절대적인 「圓滑」한 信賴感, ②그 「優美」한 和合·團結의 정신 ③서로의 「아늑」한 감사와 祝福의 一念 등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좋은 종교가 가정에 미치는 영향은 형식적 종교 신자가 아닌 나로서도 위선 그 좋은 점을 列擧치 않을 수 없다.
아무리 肉親간에도 가다간 혹 상호간에 「不信」이 있을 수 있다. 조그만 不信이 종종 가정의 紛爭을 유발한다. 그런데 그 야릇한 不信을 대번에 一掃하는 妙方은?- 공통된 信仰을 통하여 相對를 믿고 자기의 信念을 믿는 것이다. 一例로 내가 푼돈의 用處를 따져 며느리의 진술을 좀 不信할때 내가 그녀에게 짐짓 「天主께 宣誓하라」고 명령하여 그녀의 한마디로 내 不信이 금방 참회되고 解消된다. 그녀는 가톨릭信者요, 내가 「공통」된 信仰을 가지지 못했으나 내가 그녀의 天主신앙을 믿는다. 내가 불행히 未信者여서 그리스도의 계명인 「맹세하지 말라」를 그녀에게 課함이 죄스럽지만. 和合과 단결의 정신도 종교적 영향 밑에서 더 高次的으로 잘 이뤄지리라 생각한다. 예컨대 「같은 血緣의 공동체」라는 관념보다 더 넓게 「동일한 天主(하느님)의 子女」라는 高次的인 사상에서. 그러나 나는 아직 거룩한 종교人이 못되어서 그런 고귀한 實感을 가지지 못한다. 기껏해야 관념적으로 『남도·빈대도·나와 同類인 「한 가지에 돋은 잎」이라』고 新羅高僧과 함께 입으로 읊조리는 정도일 뿐. 내가 實感으로 체험하는 「사랑」은 겨우 어린 손자의 상긋웃는 눈매에 내 자신의, 혹은 내 어머니의 눈 모습을 연상하고, 자며 꿈꾸는 손녀의 떡부스러기가 묻어있는 입가의 신비한 미소에 神의 축복을 느끼고, 어린애들이 혹시 앓을 때 『차라리 내가 대신 않았으면』하는 마음이라 할까.
그러나 이만한 정도의 「사랑」도 기실 나의 종교「적」여간한 수양에서 由來했으니, 내가 정작 경건한 何者라면 어떠할까? 協力과 단결이야 더구나 말할 것도 없다. 모든 公認된 종교(기독교, 이스람교 기타)의 정신이 필경 그것이 아니었던가.
한걸음 나아가 그 근본적 動力인 「희생」의 정신은 바로 敎祖와 使徒들의 정신이요, 역대 殉敎者의 정신이 아니었던가. 그러한 정신으로 내 妻가 내 子女·손자들이 가정의 모든 일에 앞장선다면 얼마나 좋을까? 심지어 이웃과의 싸움에서 꼭뒤가 세뽐씩되는 이웃 子女들이 우루루 벌떼와 같이 나오는 것을 볼때 그 「十字軍」적 정신이 부러웠다. 나는 숫제 그 종교적 희생정신이 薄弱하여 손녀의 코를 잠깐 씻어주면서도 『내가 너를 위하여 2초의 시간을 「봉사」했노니 네 부디 잊지 말지어다』로 공치사를 잊지 않는 얄팍한 생각을 가지지만.
「감사와 기도(기구)」의 자세는 가정에서도 필수한 和樂의 비결. 며칠전 어느 영화에서 修女중 퇴생의 어느 가정에서의 경건한 식사기도의 장면을 보고 우리 가정에서도 이것만은 실행하리라 생각 했다. 내가 비록 기독교신자는 아니나 식탁에서의 「日用한 양식에의 감사」는 워낙 重노동 않고 「粒粒辛苦」를 먹는 나로써 儒敎的 머리속에 진작 배어있는 바요, 이 살기 어려운 現世에서 다행히 나혼자의 벌이로써 5·6인의 가족이 그렁저렁 無難히 풀칠하는 그 5·6인으로써도 마땅히 내게 아니 造物主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다. 종교가 가정에 미치는 좋은 영향은 婚禮, 喪禮 등의 엄숙성 내지 安心立命의 死生觀 등등 허다하나 이만 줄이고 그 언짢은 영향도 몇가지만. 크게는 얼마전 보도된 某교파 가족일동이 不信하는 家長에게 「不死」를 증명코자 집단적으로 극약을 먹고 自殺한 것 같은 狂信내지 시골, 변두리의 계룡산족속 무당 등의 迷信 따위가 가정에 침입한다면 큰일이요, 작게는 家事을 전폐하고 종일 敎友심방, 교회참석으로 가족의 끼니를 굶게 한다면 딱한 일이다.
■ 자녀교육 종교적 정서필요 / 마주해(가정주부)
불행에도 감사하며 마음안정 유지
요즘 우리집 꼬마들에게 밥먹기 전에 가슴에 성호를 긋고 『오늘도 밥을 먹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하는 짤막한 기도를 가르치고 있다.
이제 말을 겨우 하는 맨 끝의 녀석에게는 별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장난의 일종으로 받아들이는 듯하지만 일곱살이나 된 큰딸애에게는 이제 종교적인 분위기가 적절한 가정교육에 필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애들 셋이 전부 우리부부를 따라 유아영세를 받았지만 그들이 정작자라서 다른 성년들처럼 神에 대한 회의 속에서 헤매지는 않을지 유아영세가 다음에 그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는지에 대해 나는 솔직히 알송달송 하다.
그러나 내 생각으론 신앙을 가진 사람은 갖지 않은 사람보다는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하는 죽음에 대한 공포나 사후의 일같은 것에도 남처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고 불행이 닥쳐도 이보다 더 큰 불행이 아니어서 감사하다고 오히려 아량(?)을 베풀기도 하기 때문이다.
초조하고 불안해하지 않고 마음의 안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사회에서 가정에서 살아가는 데에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리라.
훌륭한 종교인, 확고한 믿음을 가지려면 되도록 어려서부터 종교적인 가정 안에서 오랜 세월을 두고 신앙의 마음을 지켜 나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성년이 되거나 더군다나 나이가 많이든 후에 참 믿음을 찾기란 어려울 것 같다. 십여년전 가족이 하나 둘 영세를 받고 가톨릭교인이 될때 나도 神께 매달리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에서 영세를 받았지만 아직까지도 조그만 회의를 버리지 못한 부끄러운 신자이다.
이러한 내가 神에 대해 왈가왈부한다는 사실조차가 넌센스이다. 그러나 시장바닥에서 혹 일전을 갖고 다투다가도 같은 교우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금방 분위기가 부드러워지기도 한다. 허지만 얼마전 신문에서 보듯이 『믿음이 있는 자는 독을 마셔도 안죽는다』는 비현실적인 전도로 온 가족의 참사가 있었고 가끔 시골이나 변두리에서 광신자의 무지로 희생당하는 사람이었다는 기사를 볼 때 사이비 종교에 대하면 疑구와 환멸을 느낀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과 위선 아닌 참믿음과 건전한 삶을 줄 수 있는 종교라면 개인이나 가정에나 나쁜 영향을 끼칠리가 없다.
내가 이런 생각으로 내 가정 안에 차츰 종교적분위기를 만들려했더니 아직 불신자인 나의 시아버님께서도 내 생각에 차츰 찬동하시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