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늦은 꽃 (27) 돌아와서 ①
발행일1969-06-29 [제675호, 4면]
『떠나다니요?』
최군으로서는 뜻밖의 말이라 놀랐다. 혜경이한테서 듣지 못했던 말이기 때문이었다.
『이모님따라…』
현주는 아주 간단히 이야기 했다.
『그래요?』
최호진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가
『돌아올때까지…』
끝말은 채 맺지 못했다.
현주가 끝을 이어주었다.
『기다리겠다는 얘긴줄 알아요. 그러나 그런 의무와 부담을 지워놓고 가구싶진 않아요. 지금은 이곳으로 깨끗이 끝을 맺고, 그땐 그때대로 두구보는 거얘요.』
최호진은 더 말이 없었다.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가까와 지고 있었다. 스튜어디스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곧 비행기가 공항에 내릴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현주는 까닭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8년만에 다시 밟아보는 고국의 땅이었고, 서울의 거리다. 얼마나 그리웠던 곳인가? 눈물이 글성해지면서 현주는 아나운스멘트대로 허리에 띠를 채웠다. 8년전 현주는 Y교수를 통해 박훈씨의 혼담을 거절하고 최호진에게는 직접 남한산성에서 외국에 갈 것을 밝힘으로써 프로포즈를 거절했다.
그리고 마음을 외곬으로 잡고 이모가 하라는 대로 여권수속에 응했다. 여권은 순조롭게 나왔고 서독까지의 여행이 마치 동대문께서 영등포쯤 이사하는 것보다 더 간편하게 이우러졌다.
서독에서의 생활도 순풍에 돛을 달고 거울같은 바다를 달리듯 하는 이모의 생애처럼 순탄하게 펼쳐져 나갔다. 가정부라는 명목으로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고 망서렸던 일이 어린애 같게 여겨지면서 『참잘했다, 잘했다』를 거듭 거듭 뇌이는 나날이었다.
그러나 더욱 좋았던 일은 전공과목을 더 연구할 수 있는 길이 트인 사실이었다. 서독에서 2년, 이모부부가 다른 임지로 올믹게 되자 현주는 그동안 다니던 대학의 알선으로 장학금을 얻어 미국으로 옮겨가게 됐다.
미국에서 6년. 지금, 전공에 관한 학위와 새 지식을 안고 8년만에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벌써 설흔을 두셋이나 넘긴 현주였다.
외국에서의 생활이 순조롭기로는 이모의 말대로였으나 한가지, 그렇지 못한 일이 있었다. 알맞는 결혼상대가 생겨지지 않은 일이었다. 서독에 있을때 엿다. 경제학을 전공하는 유학생과 좋은 사이가 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결혼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흐지무지 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영 좋은 인연이 맺아지지 않았다.
그런대로 현주는 지금 떠날때보다는 훨씬 숙성한 모습으로 그러나 감회로 가슴을 설레면서 김포공항에 내리려는 참이었다.
두서없이 떠오르는 감회중에서도 가슴을 더욱 설레게 하는 것은 박훈씨와 최호진군의 그후의 소식이었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쉽게 잊혀지리라고 생각했던 일이 그동안 외국생활 속에서 가끔 짙게되살아나곤 했었다. 더구나 고국이 그리워지고,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 간절할땐 의례 두사람의 일이 떠올랐었다.
그런 두 사람이 지금 비행기가 고국의 땅에 닿으려는 이때에도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역시 어머니를 뵙는다는 강렬한 기쁨에 억눌리우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에 비행기는 땅에 닿았다. 비행장에는 어머니를 비롯해 친척들과 금년에 국민학교에 들어간 아들놈까지 데리고 나온 혜경이 부부, 그리고 그밖의 몇친구들이 현주를 환영했다.
『왔구나!』
떠날때보다 훨씬 늙은 어머니는 딸을 보자 덥썩 껴안고 눈물을 글성거리고 있었다. Y교수가 불쑥 뛰어나와
『야아, 현주군, 허허헛…』
8년의 세월의 흐름 속에서 자신만은 변하지 않았다는 듯이 걸걸한 목소리, 소탈한 웃음을 웃으면서 현주의 손을 잡고 되게 흔들었다.
혜경이는 이젠 완전히 아주머니 티가 박혀 있었고 남편은 자리잡은 신사로 보였다.
『현주 아주머니께 인사해.』
혜경이가 자랑겸 아들놈에게 말했다.
머리를 꿉벅하는 혜경이의 아들이 귀엽고 씩씩해 보였다. 그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현주. 그 광경을 만족한 듯이 보고 있는 혜경이….
현주는 자신만이 변하지 않고 있구나 생각했다.
시내로 들어올때에 현주는 어머니와 Y교수와 셋이 한차를 타게됐다. 어머니가 앞자리에 앉겠다고 고집을 부려 현주는 Y교수와 뒷자리에 앉았다.
『이 사람이 나온다고 했는데…』
차가 비행장 구내를 벗어나와 시가를 지난뒤에, 김포고속도로에 접어들자 Y교수가 느닷없이 말했다.
『누구 말씀이얘요?』
『박군 말이야.』
『옛?』
현주는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이었다. 박군이라면 박훈씨다. 그분이 내 마중을 나오겠다고 했다니?
『현주군이 온다고 했더니 나두 환영해야지 하고 시간을 물었는데…』
Y교수는 담담하게 말했다. 현주는 그동안의 박훈씨의 소식을 묻고 싶은 충동을 걷잡을 수 없었으나 입이 열리지 않아 잠잖고 있었다.
Y교수는 그이상 박훈의 말은 하지 않고 화제를 달리 들려 그동안 외국에서 지내던 일을 단편적으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