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7월 2일은 헤밍웨이 간지 8년이 되는 날이다. 44년전 그의 첫작품이 발표된 이래 그가 가버린 지금까지도 여전한 인기를 끌고있는 行動의 작가 헤밍웨이의 周忌를 맞아 그의 일생을 다시한번 더듬어 본다.
헤밍웨이는 1899년 「일리노이즈」주 「오크 파크」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組合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양친은 모두 독실한 신자였으며 삼촌중에는 의료선교사도 한사람 있었다.
어린 헤밍웨이는 신체적으로 사납고 정력적이어서 사냥과 낚시를 즐기는 아버지를 열심히 따라 다녔었다.
또한 고집이 세고 운동을 좋아하여 어릴때부터 골목대장의 면모가 엿보였다.
남보다 뛰어날려고 애썼으며 자존심도 강했다.
자기경험을 그린 고등학교시절의 작문을 보면 이미 글 쓰는데 탁월한 소질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졸업후 대학갈 생각을 버리고 「캔사스 시티 스타」紙의 기자가 됐다가 18세에 赤十字社의 「앰브란스」 운전사를 자원하여 세계제1차대전에 이태리 전선에 파견되었다.
참호 속에 있는 이태리 병사에게 담배를 전하다 심한 부상을 입고 「밀라노」 병원에 수개월 입원해 있는 동안 사귄 간호원이 나중에 「무기여, 안녕」의 여주인공 바클리의 「모델」이 된다.
귀국하여 「토론토 스타」紙의 기자로 취직했다가 「쉬카고」로 옮겨 거기서 당시 이미 저명한 작가였던 셔우드 앤더슨을 만나 격려를 받는다.
22세때 8년 연상인 해들리 리차드슨과 결혼하여 그 여자의 돈으로 「빠리」에서 작품 쓰기에 전념하여 가끔 지상에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겔트루드 슈타인, 에즈라 파운드, 제임스 죠이스, 스캇트 핏제랄드 등 많은 文人들과도 사귀게 된다.
그는 자기가 쓰고 싶은 筆體에 대해서 뚜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즉 자기가 「본 것을 그대로 옮기기 위해 장식 없는 서술적 문장으로 진실되고 단순하고자 했다.
이것이 그의 일생의 목표였으며 이것을 추구하기 위해선 슬픔과 기쁨을 맛봐야만 했다.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첫 소설은 1926년의 「해는 다시 뜬다」인데 단편에서아 마찬가지로 「본대로 옮기기」위한 노력의 성과가 여기에도 나타난다.
그는 「본대로 옮기기」위한 노력의 성과가 여기에도 나타난다.
그는 「본대로 옮기기」 위해 경험과 자기가 사귄 인물을 감각적인 필체로 묘사했다.
그의 책들은 인기를 얻어 명예와 재산을 한꺼번에 안겨주었는데 장 · 단편을 불구하고 영화화도 됐으며 그런중에도 그는 투우와 아프리카 수렵여행기도 썼다.
피를 흘리는 「스포츠」에 대한 그의 정열은 그의 책 전편에 흐르고 있다.
전생애동안 이 「죽이는 것」에 대한 그의 몰두에는 몸서리쳐지는 바가 없지 않다.
그는 전쟁에 매혹되어 1930년대 스페인 내란에도 참가했으며 제2차 대전때는 영국, 불란서, 독일에서 활약했다.
폭력은 그를 사로잡아 언제나 사람들에게 권투를 청하여 이 속에서 뭔가를 극복할려고 애썼다.
그는 중상으로 여러차례 생사의 고비를 넘긴데다 폭음까지 겹쳐 갓 60이 됐을땐 그 강인하던 체격이 형편없이 쇠약해져 피해망상증에 시달리며 집필조차도 불가능했었다.
그의 생리에 전혀 맞지않는 답답한 병원생활을 두번이나 치르고 집으로 돌아오자 곧 엽총으로 자살해버렸다.
1961년 7월 2일의 일이다.
그의 아버지도 자살로 생을 끝냈으며 그 자신 죽기 수년전부터 자살을 입에 담았다고 한다.
자기의 정신을 따르지 않는 육체를 배반자라 생각하여 처치했다는 것이다. 헤밍웨이는 가톨릭인가? 1918년 심한 부상으로 병실에 누웠을때 다른 병사들과 함께 종군신부의 종부성사를 받았는데 그후 이것이 그의 가톨릭에의 입교로 이야기됐다. 그의 두번째 아내는 가톨릭신자로 그들은 성당에서 결혼했으며 그는 정식 가톨릭으로 자처하고 가끔 미사에도 참석했으며 한번은 사순절에 술을 끊기도 했다.
1955년에는 「노벨」상 기념 「메달」을 「산디아고」성모당에 바쳤으며 그의 장례식도 성당에서 치뤘다. 이리하여 다른 모든 이와 마찬가지로 「바르고 정확한」것으로 자처하던 한 인간이 모순과 모호 속에 사라져 갔다 (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