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救世史(구세사) 교실] ⑲ 聖祖史記(성조사기) ⑨ 이사악과 야곱
選擇(선택)의 經綸(경륜)
「약속」의 受任者(수임자)는 누구
나중된자 먼저되고…
발행일1969-07-06 [제676호, 2면]
성경 저자(야휘스트)는 둘째 聖祖 이사악이 같은 아람족인 친척의 규수 레베카와 결혼하는 이야기를 구세사적 견지에서 매우 소상하게 보고하고 있다. (창세기 24장). 이야기 줄거리는 당시의 혼인 풍속대로 엮어졌으나, 저자는 이사악의 혼인이 하느님의 섭리적 간섭으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하고 있다. (24·27)
그럼으로써 하느님은 반드시 비상한 방법으로써만 인간사에 관여하시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눈에 안띄게 섭리적 안배를 하신다는 사실을 敎訓化 하였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그랬듯이 레베카도 石女여서 이사악이 야훼께 기도하고 야훼께서 이를 들어주심으로써 비로소 임신하게 된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받은 하느님의 약속의 受任者는 『사람의 욕정을 따라 난 아들이 아니고 하느님의 약속을 따라 난 아들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다.
그러나 레베카는 임신하자 고통이 많아 『야훼께 물어보러 갔다』 (25·22). 그녀가 얻은 답이 神託의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짐자건대 그녀는 어떤 占術者나 제관을 찾은 것 같다. 『너의 배안에 무 백성이 들어있으며 너의 속에서 두 민족이 갈라지리라』(25·23). 이 세상 특히 異敎的 환경에서 神과 善을 追求하는 모든 이의 심볼이라 할 수 있는 「멜키세덱」과(창세 14·18 이하) 민수기 22~24장의 「빌람」 의 이야기도, 非이스라엘系의 제관이나 占術者에 의한 託宣이 가능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聖祖史話가 고대근동의 지방적 환경과 직접 연결되어 있고 또 그만큼 믿을 수 있다는 증거이다.
성경에는 이사악의 생애가 아브라함의 그것과 거의 같은 윤곽으로 묘사되어 있다. (26장 참조)
특히 구세사적으로 의미깊은 것은 아브라함이 두 아들 이슈망엘과 이사악의 알력 때문에 속을 썩혔듯이 이사악도 두 아들(쌍둥이) 「에사우」와 「야곱」의 다툼으로 고민하는 것이다. 「야곱」이 팥죽 한그릇으로 「에사우」의 長子 相續權을 산 것은, 단순히 그의 교활한 술책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당시 실제로 상속권을 팔고 살 수 있었던 法的 근거가 전제되어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이 長者權이 단지 재산상속에만 限하지 않고 族長으로서의 氏族영도권, 따라서 하느님의 약속의 受任者가 된다는데 보다 큰 의의가 있었다. 이점에서 異敎徒인 「헤트」 여인들을 아내로 맞은 「에사우」는 이미 그 자격을 상실했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26·34 참조)
이사악이 분명히 야곱의 속임수를 알아채고서도 그대로 야곱에게 長者權에 따른 축복을 했다는 것은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택의 경륜에 승복하는 신앙고백이다.
성경의 보고는 비록 명확하게 야곱의 속임수를 단죄하지는 않았지만 매우 리얼하고 준엄한 筆致로 그의 성격을 묘사하고 있다. 예컨대 야곱 자신도 양심의 가책을 받아 주저하였으나 어머니 레베카가 스스로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하며 아들을 설득하였다고 했다.
그 보속으로인지, 야곱은 오랜 세월 타향살이의 고초를 겪어야 하고 레베카도 그렇게 사랑한 아들의 덕을 못보고 죽는다. 후대의 예언문학은 야곱의 행동을 단죄하고 비록 약속이 受任者이기는 하지만 하느님 앞의 죄인으로 낙인찍고 있다. (호세아 12·2, 예레미아 9·4, 이사야 43·27 참조) 독자에게 긴장감을 안겨주는 이 모순에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구세사의 逆說的 신비가 드러난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들들이 아직 나기도 전이요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느님은 당신 선택의 경륜이 사라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당신의 부르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나타내시려고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라고 레베카에게 말했읍니다.』(로마 9·10~13). 이러한 구세사적 신비를 보다 뚜렷하게 敎示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마테오복음 20장의 「착한 포도원 주인」에 관한 비유가 그것이다.
이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아침부터 온 종일 일한 사람이나 오후 늦게 와서 한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이나 똑같은 품삯을 준다. 이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느님은 律法的 입장을 고수하시는 분이 아니고 인간적 상식을 초월한 사랑을 베푸는 너그럽고 친절한 분이시라는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복음서 문맥의 전후관계로 미루어 세말에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심판하기 위해 열두보좌에 앉을 사람은 이스라엘의 종래의 지도자들 즉 파리세이나 율법학자들이 아니고 그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무식하고 천하게 보인 使徒들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을 정당화하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복음서는 하느님의 자유로운 관용에 의한 이 선택의 신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나중된 자가 먼저되고 먼저된 자가 나중될 것이다』 (마테오 19·30,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