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평신도 사도직의 기초는?
②무엇이 사도직을 효과적이게 하는가?
③사도직의 목적은?
④사도직은 언제, 어디에서?
⑤개인과 공동체로서의 사도직
⑥평신도 사도직을 위한 양성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의 첫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교회창립의 목적은 천주 성부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 왕국을 전세계에 펴고, 모든 사람을 구원에 참여케 하며, 또한 그들을 통하여 전세계를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는 일이다. 이 목적을 위한 신비체의 활동을 모두 「사도직」이라고 부른다. 교회는 모든 지체들을 통하여 이 사도직을 여러가지 모양으로 실천한다.』
「모두」라는 이 짤막한 말을 잘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의 그리스도의 사명완수를 지향하고 그의 교회의 모든 지체를 통해 수행된 「모든 활동」이 곧 사도직이다.
사도의 고유한 사명은 성부에 의해 그리스도께 맡겨진 것이며 그리스도의 각 지체는 그것에 참여한다. 우리는 그의 지체이기 때문에 우리가 만나는 사람, 만지는 물건, 사용하는 돈, 먹는 음식 등 우리활동의 하나하나를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여 이 한가지 목적에 지향을 들 수 있다.
흔히 『사도적 활동을 할 시간이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우리가 쓰레기 청소부에게 다정한 아침인사를 건넨다면 그리스도의 왕국은 확장된다.
그리고 사무실의 책상을 그 창조자와 천주의 모상으로 만들어진 그 사용자에게 더 맞갖게 하기 위해 그 위의 담뱃재를 닦는다면 그리스도는 그 자리에서 더 완전히 왕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으로 매일매일의 일과를 성실히 행하는 것이 바로 사도적 활동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한 그릇의 밥을 먹는다면 곧 성신의 궁전인 하아늬 몸을 건설하는 셈이다.
이것을 할 시간도 없는 사람이 있는지?
지난번 공의회는 우리에게 크리스찬으로서의 일상생활의 경이를 더욱 인식시키고자 했다. 영세를 통한 그리스도의 지체는 견진에서 성신으로 강화되어 우리의 『사도직은 믿음과 바람과 사랑으로 실천되는 것이며 이 신 · 망 · 애 삼덕은 성신이 교회의 모든 지체들 마음 속에 부어주신다. (교령 3절)』 성체로 끊임없이 우리속에 보양되는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메시지」를 알리도록 재촉한다.
어떤 특수한 순간에 우리가 그것을 「느끼는 것」과는 상관없이 이것은 우리가 살고있는 천주 주신 현실이다.
그리스도와의 이 일치 때문에 우리는 그의 사명에 필연적으로 참가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평신도사도직의 기초이다. 더욱이 이 사도직을 위해 성신은 우리 각 사람에게 특별한 은혜를 부여한다.
『…극히 단순한 은사라 할지라도 이런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교회안에서 이런 은사를 사용할 권리와 의무가 각 사람에게 생기는 것이다.』(교령 3절)
제3차 세계평신도대회에서의 가장 좋았던 점 중의 하나는 이 진리의 재발견에서 오는 끓어오르는 환희였다.
그것은 『우리중에 한사람도 소극적이어서는 안된다』는 바람의 아낌없는 폭발이었다. 그것은 『모든 겨레와 문화의 기여, 그리고 개개인의 특은이 충분히 인정되고 표현돼야 한다』는 확고하고 열렬한 호소였다.
이 나팔소리에 호응할려는 기미가 확실히 한국에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한국과 같이 층이 많고 『유행이니까 싫어도 따른다.』는 식의 사회에는 약간 어리벙벙한 소리일 수 밖에!
가령 어떤 사람이 조금이라도 남과 다르게 행동하면 즉시 그 사람을 짓누르려는 경향이 왕왕 있다. 특히 상대의 나이가 적거나 계급이 낮으면….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부터 성신은 누구를 통해서나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우리 모두가 성신이 다른 사람에게 준 특은을 인정하기 위해 더 눈을 떠야하지 않을까? 따라서 우리 자신에게 준 특은에 대해서도…?
『극히 단순한 은사(異蹟 아닌 특은)』라고 말한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에 따라 어떤이는 사건을 쉽게 체계화할 수 있는 은혜, 또 어떤이는 남의 이야기를 느긋하게 들어줄 수 있는 은혜, 또 남들이 너무 심각하게 둘 때 웃길 수 있는 은혜를 받았으며 또 내가 감히 표현도 할 수 없을만큼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남이 필요로 하는 것일때도 있다. 이러한 것은 모두 성신이 우리에게 교회에 바치라고 준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찬 가운데 열등의식을 가진 자가 있어서는 안된다.
이 열등의식이 바로 성신의 활동을 막아버리니까. 극적이거나 그렇잖거나 이 특은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 특히 자기 사목자들과 일치하여(교령 3절)』 모든 이에 의해 실천되어야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평신도 세계대회에서의 달갑잖았던 면을 우선 살펴보기로 한다.
사람들은 성신이 교회의 모든 지체속에 작용한다는 것을 믿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정치전 권모술수에 의해 흔히 실제에 있어서는 부정되었다. 반대편이 거의 자리를 비웠을때 동의를 밀어내놓고 「불도저」식으로 투표를 권했다. 이 謀士들은(거의가 사도적 운동의 경험많은 지도자들이란다!) 그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도 성신의 은혜가 내린다는 것을 거의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우리도 지역적으로 때때로 어떤 운동이나 그 운동의 지도자의 목적을 위해, 또는 한 특수한 의견의 「성공」을 위해 교묘하게 남들을 조종하고 이용하지 않는지? 이것은 비난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의 질문에 지나지 않는다.
흔히 우리는 자기의 의견이 우세하지 않으면 운동이나 회합에서 퇴장해버린다는 얘기를 듣는다. 또 그들 자신이 회장이거나 간부일때는 대단히 「활동적」이나 임기가 끝나면 그 운동에 대한 모든 봉사를 팽게쳐 버린다는 사람들의 얘기도 들린다. (말할 것도 없이 이와 상반되는 극히 훌륭한 예도 허다하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모든 특은과 재능을 우리의 자신의 명예나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체의 이익을 위해 바친다면 우리의 본사는 명예로운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숨은 활동에서도 똑같이 충실해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내리는 성신의 특은을 인정한다면 그들의 계획이나 생각에 성급한 판단을 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하게 될 것이다.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태어 갑는 補完은 均一보다 훨씬 더 경이로운 것이다. 교회내에서의 補完은 하나이신 성신의 교향악이다. 특은은 우리 각자를 사도로 만드는 일을 하나 그 목적은 사도적 백성의 일치 속에서의 하나릐 역할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초기의 신자들은 『한마음 한뜻』이었고 그들은 『가진바 모든 것을 공번되이』 썼다. 이로 인해 그들은 『즐겁고 순직한 마음으로(사도행전 2장)』 생활했다.
그러므로 나의 시간, 나의 지식, 나의 재산, 그리고 모든 나의 특은이 全신비체의 봉사를 위해 있을때만 나는 증거하는 공동체의 증진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인간을 그 주인에게로 이끌어 들이는 힘이 있다.
梁 수산나(대구가톨릭여자기술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