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救世史(구세사) 교실] ⑳ 聖祖史記(성조사기) ⑩ 「하란」으로 간 야곱
하느님과 씨름해서 얻은 이름 이스라엘
恒久(항구)한 信賴心(신뢰심)으로 懇求(간구)하면 親舊(친구)처럼 들어주는 하느님
발행일1969-07-13 [제677호, 2면]
야곱의 傳說圈은 이스라엘族長들과 북부지방 및 아람족과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남부(헤브론, 베르사베, 네겝 등지)에서 예배드린 神과 북부의 聖所들에서 예배드린 神이 같은 하느님이라는 것을 강조하려고 했다. 성경저자의 이러한 의도는 아브라함과 이사악이 받은 것과 똑같은 하느님의 약속을 야곱이 「베텔」에서 받았다는 보고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너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이사악의 하느님 야훼로다. 네가 지금 누워있는 땅을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노라. 너의 자손은 땅의 먼지처럼 많아져… 너와 너의 자손으로 말미암아 세상 모든 겨레가 축복을 받으리라…』(창세28·13이하). 그러므로 族長時代의 이러한 깊은 유대와 통일성은 어떤 일정한 系譜에 의해서가 아니라, 같은 하느님(이른바 聖祖들의 하느님)에게 예배를 드림으로써, 그리고 같은 약속을 여러 世代들이 繼承 分有함으로써 유지되고 발전되었을 것이다.
야곱은 에사우를 겁내어 메소포타미아의 「하란」으로 가다가 前記 「베텔」에서 꿈에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은 사다리」를 보았다고 했다.
성서학자 「클라우스 세돌」에 의하면 이것은 메소포타미아의 거대한 계단식塔(바벨塔 참조)들에서 얻은 「이미지」일 것이라 한다. 당시 兩河地方 사람들은 그탑의 꼭대기에 神이 산다고 생각했다. 『사다리를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했다』는 것도 이 탑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祭禮行列에서 얻은 「이미지」로서 천사들이 거행하는 天上祭禮를 표상했을 것이라 한다. 어쨌던 성경본문에 의하면 야곱은 이 꿈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하느님과 천사들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그곳에 기름으로 축성한 종교적 記念石을 세웠다.
엘로히스트는 아브라함때부터 성소로 되어온 「베텔」이 이제는 단순히 야훼 現存의 곳이 아니라 하느님과 사람을 결합시키는 「하느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라 했다.
이 말은 그대로 오늘의 성당에 적용시킬 수 있다(11월 9일 구세주 대성전 축성일 미사경문 입당송 참조).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나타나엘」을 부르셨을때 당신의 사명을 야곱이 꿈에 본 사다리에 비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人子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너희가 보게되리라』(요한 1·51).
성경에 의하면 「하란」에서의 야곱의 결혼은 이스라엘의 民族形成에 있어 하나의 중요한 機會를 이루고 있다. 비록 여러 어머니에게서 나기는 했지만 이스라엘 12지파가 야곱과 관련지어져 있기 때문이다(12는 상징적 수이다).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에 관한 설화에는 문제점이 많다.
그것은 본래 이스라엘 여러지파의 創名始祖들에 관한 傳統이니만큼 성경 본문만 가지고서는 이 조상들의 역할과 상호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성경저자가 그들을 聖人으로 조작하지 않고 그들의 사람됨을 지나칠이만큼 赤裸裸하게 묘사하는 한편, 하느님의 계시에서 비롯한 종교적 유산의 수호자로 그들을 부각시키고 있는 점이다. 오랜 타향살이를 청산하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 도중 야곱은 救世史上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건을 겪는다.
즉 「야복」강변에서 어떤이와 밤새도록 씨름을 하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게되는 것이다. 성경본문에서 이 「어떤이」는 천사가 아니라 하느님 자신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때 야곱의 고두리뼈가 퉁기어졌다는 것은 하느님의 실제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강조하려는 확인 표적이다.
『너의 이름은 이제 야곱이 아니라 차라리 이스라엘이라 불리리라. 이는 네가 하느님과도 겨루었으니 사람들하고는 의례 네가 이기게될 까닭이니라』(32·29)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이 귀절에 따라 보통 民間語源學的으로 「하느님의 투사」라고 해석되지만 言語學的으로는 불충분하고 그것은 『하느님은 싸우시다』 혹은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의 기도로서 『하느님은 싸워주소서』라는 뜻이라 한다.
요컨대 야곱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하느님과 씨름을 하였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이름에 관한 계시증언이 아니라 하느님의 본질에 관한 계시증언이다. 그 본질은 야곱이 받은 축복에 뚜렷이 드러났다. 즉 그에게 충만한 생명력이 주어졌고 이것은 또한 그의 家門 전체에 넘쳐흘렀던 것이다. 이 「씨름과 축복」 이야기는 우리에게 루까복음 11장과 18장의 「도움을 청하는 친구」와 「하느님을 두려워히지 않는 재판관」에 대한 비유 이야기를 상기시킨다.
이 두 비유는 흔히들 말하는대로 「항구한 기도」가 그 요점이 아니고 『하느님은 사람의 간구를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것이 그 주요 「테마」이다.
즉 우리가 굳은 믿음과 깊은 신뢰심을 가지고 하느님은 마치 이웃이나 친구처럼 반드시 그리고 즉시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이 이 두 비유의 「케리그마」이다.
야곱의 「씨름과 축복」 이야기도 이러한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