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늦은 꽃 (48) 분수령 ⑭
발행일1969-12-14 [제697호, 4면]
용신이를 외국에 보내 놓고 보니 현주는 허전해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용신이가 몇해만 외국에서 피나는 정진을 하면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리라고 생각하니 그 허전함도 참아낼 수 있었다.
도착한 뒤 이내 편지를 보내준 것은 안착했다는 통지에 지나지 않았으나 몇 주일 지난 뒤에는 자세한 편지를 보내 주었다.
미리준비를 하느라고했으나 언어가 소통되지 않는게 가장 고통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열심히 그곳에서 익힐 작정이므로 그다지 걱정될 것은 없을 것이노라고 적어 보냈다. 현주는 자신이 처음 서독으로 갔을 때의 일을 생각하고 용신이의 고생이 어느 정도일 것을 짐작해 보았다.
(얼마나 막막할까?)
그러나 용신이의 편지에는 사사(師事)하게된 음악가가 엄격하고 괴팍스러운 성격이어서 그걸 견디어내기 더 어렵겠노라고 슬그머니 풍겨주기도 했다.
(어머! 어쩌나?)
생소한 고장, 생소한 생활, 말도잘 통하지 않는데다가 선생마저 그렇다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주는 나긋나긋하게 자신 처음이 구라파에 갔을 때의 일을 참고삼아 들어가면서 견디어 낼 것을 당부하는 회답을 보내곤 했다.
<…이를 악물고 견디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견딜 수 없읍니다. 견딜 수 없다는 것은 이제 와서는 말이나 생활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지금쯤은 익숙해졌읍니다. …그런데 여기서 살 의욕이 생기지 않습니다. 선생님도 이젠 나를 이해해주는 듯합니다. 그러나… 선생님, 선생님이 여기 오실수 없을까요? 선생님 곁을 떠나있다는 사실이 이처럼 가슴에 구멍을 뚫어 놓은 것 같음을 여기 생활이 익어지고 나니 뼈저리게 느껴집니다…』
이런 편지가 왔다.
<그걸 홈식크라고 하는 거야 누구나 외국에 나간 사람이면 한번씩은 걸리기 마련인 일종의 홍역이라고 할까>
이런 뜻으로 현주는 위로의 편지를 보냈다.
<…저의 감정을 그저 홈식크라고 규정지어 버리는 선생님이 저로서는 너무도 야속스럽습니다. 저의 심중을 그렇게도 알아주지 못할까하고 원망해 봅니다>
<…용신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야 그러나 공부하러간 사람, 더구나 감정과 정서를 순수한 상태로 유지해 오직 현악에만 집중해야할 용신이 아닌가요? 모든 쓸쓸함 그리움 외로움의 감정을 음(音)속에 승화시켜 크게 성공하고 돌아와야 될 줄 알고 있는 거요>
현주의 편지는 너무 높은 위치에서 있는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동년배의 이성에게 하는 편지 같지도 않게 용신이의 마음을 누그려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도록 쓰느라고 했다.
그러나 용신이는
<선생님 소원입니다. 제있는 데로와 주시오, 이젠 바요린을 만지는 것도 역겨워졌읍니다. 며칠 고열로 않고 났읍니다. 않는 동안 나는 생각했읍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뼈속에 스며드는 그리움과 외로움에 지지않고 공부를 해야 한다고 몇번 다짐을 해보았읍니다. 그러나 안되는 일이었읍니다. …그만 선생님 옆으로 돌아갈까 봅니다!>
이런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이 무슨 나약한 심정일까?)
현주는 등골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은 기분이었으나 자신이 용신이가 없는 서울에서 서글프고 허전한 생활에 허둥지둥하는 걸 생각하면 용신이만을 나무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C씨로 부터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찾아가니 C씨는
『이거 어떻게 된 일입니까? 용신이가 게으름을 부려 변변히 연습도 하지 않을뿐 아니라 가끔 술을 마시고 애를 먹인다는 얘긴데…』
C씨의 친구, 용신이를 부탁했던 사람으로부터 온 편지를 보여주었다.
현주는 아무 대구도 못하였다.
골통담배를 무겁게 빨던 C씨는
『젊은 사람들 자칫 잘못하면 그렇게 된다니까요…』
연기를 내뿜고
『그러나 박용신군은 그렇게 바람이 나거나 타락할 줄은 몰랐는데…』
스스로 한탄하는 어조였다.
『바람이 난게 아닐꺼얘요. 더구나 타락이라니?』
현주는 완강히 변명했으나 그 이상 무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아니라면 좋지마는… 편지 잘해, 정진하도록 타일르십시요.』
C씨는 씁쓸하게 말했다.
『선생님도 따끔하게 편지해주세요』
『물론 나두 그러겠지마는…』
현주는, 용신이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읽었을 때와 달리 앞이 캄캄함을 깨달으면서 어쩔줄 몰랐다.
겨우 김 신부를 찾을 생각을 했다.
참고삼아 용신이가 보낸 편지를 가지고 갔다.
『아, 오셨읍니까?』
김 신부는 반가이 맞아주었다.
『안녕하셨읍니까?』
『무슨 일이죠?』
김 신부는 동안(童顔)에 웃음을 함빡 띄고 물었다.
『저어…』
현주는 어떻게 말을 끄집어냈음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용신이 일 때문에 왔어요』
겨우 서두를 뗐다.
『박용신군?』
『예』
김 신부는 또 빙그레 웃었다.
『연습을 등한히 하고 게으름을 피운다는 겁니다. 저한텐 편지로 도루 나오고 싶다구까지 했읍니다』
현주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요?』
김 신부는 머리를 끄덕끄덕하고 현주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