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의 한국교회는 그 事件으로보나 人物로보나 영광의 역사를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2백년전에 이 땅에 뿌려진 신앙의 씨가 이제 서서히 그 결실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교회의 완전한 자치교계제 확립이나 최초의 추기경을 탄생케 한 것만으로도 그 수난의 보람은 얻은 것으로 보겠다. 그러나 70년대를 내다보는 교회에는 그보다도 더 큰 허다한 난제들이 가로놓여 있기도 하다.
◆ 事件(사건) / 朴錫敦 記
敎階確立(교계확립) 敎會史(교회사)에 新紀元(신기원)
福者(복자) 늘어도 顯揚精神(현양정신) 줄어
江華島(강화도) 事件(사건)은 好機(호기)의 逸失(일실)
時報(시보) 通(통)한 여론조성이 效果(효과)보고
미온적 態度(태도) 빈축의 對象(대상)
이 나라에 가톨릭이 들어온지도 어언 2세기. 지난 10년간 우리나라는 국가적으로 다사다난했던 역경 속에서도 민족중흥(中興)의 역사를 기록했으며 또한 교회도 제2차 「바티깐」 공의회를 계기로 새로운 역사의 전환점을 이루었다.
여기에 발맞추어 한국교회도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독립교회로 인정받음과 동시에 세계 여러 나라 교회와 대등한 위치에서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장족의 성장을 해왔다.
1783년 한국에 가톨릭이 처음 들어온 이래 갖은 박해 속에서도 우리의 선조들과 외국선교사들은 기꺼이 목숨을 바쳐가며 진리를 보전, 그것이 2백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비로소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自治教區로 昇格
1962년 3월 10일 교황 요한 23세는 서울·대구·광주교구를 대교구로 승격하고 노기남 주교 서정길 주교 현하롤드 주교를 대주교로 임명함으로써 지금까지 代牧敎區였던 한국교회를 자치교구로 승격시켜 교권상의 완전한 체제를 갖추게 하였으니 실로 한국교회사에 신기원을 이루게 하였다. 2백년 한국교회사에 아마도 이것이 가장 크고 또 자랑스러운 사실이라 하겠다. 그러나 한편으로 만시지탄(晩時之嘆)도 없지 않았다.
또한 이보다 2년 후인 1964년 3월에는 성청으로부터 「한국교회를 위한 전례개혁 율령」이 인준을 받음으로써 전례의 생활화를 위해 미사봉헌 때나 성사집행에서 우리말 경문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일련의 대사건은 지금까지 오랜 세월동안 남의 힘에만 의존해온 우리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기도 했다. 사실 자치교회가 어떤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교회를 우리스스로 꾸려나간다는데 대한 보람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교회 운영에 따른 부담에 대한 공포감부터 느꼈던 것이다.
이같은 현상은 아직도 성직자가 교회의 주인이라는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교회에 신자들이 교회운영에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커다란 과제를 70년대에 넘기고 있다.
▪강화도 JOC 事件
교회의 사명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고 사회정의를 구현함에 있다고 한다면 지난 10년간 일어난 사건 중에서 우리교회에 가장 뜻있는 사건이라고 할 때 그것은 아직도 우리기억에 생생한 강화도 JOC와 직물업자들 간의 투쟁이었다고 하겠다.
사건의 발단은 JOC의 정당한 임금지불과 노동시간 엄수 등 노동자를 위한 노동조건 개선운동이 업자들의 비위에 거슬린다고 업자들이 단결하여 부당한 반응을 나타낸 데서 비롯된다. 즉 1968년 1월 8일 강화도의 20개 직물업자들은 가톨릭신자들을 채용하지 않기로 결의함으로써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였던 것이다.
사건은 더욱 발전하여 업주 측 노동자들이 JOC의 입장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고 현지 경찰서장은 강화본당신부를 『반공법 위반』 운운하면서 성무집행을 방해하고 노동운동지도를 금하는 등 험악한 분위기를 벌였다.
이에 동년 2월 7일 서울서 개최된 임시전국주교회의에서는 성명서를 발표, 사회 정의에 입각한 교회의 태도를 천명하고 강화도사건의 원만한 해결을 희망하였다. 결국 이 사건은 직접도화선이 되었던 JOC 지도자가 복직되는 정도에서 흐지부지 끝나버렸지만 그뒷 맛이 개운치 못했던 것이다.
이 사건에서 볼 때 다년간 JOC회원들이 노동자들의 생활 속에 파고들어가 현실적 노동조건과 노동자들의 실정을 충분히 파악한 결과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에서 교회 측으로는 큰 의의가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강화도사건은 교회가 울타리를 벗어나 직접 사회에 참여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지만 사건해결에 사실상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음을 솔직히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여기에 가톨릭시보가 적극적인 태도로 비교적 빠른 보도를 함으로써 사회 여론에 호소한 것이 어느 정도 효과를 보았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한국가톨릭이 사회참여에 너무나 미온적인 태도라는 것이 언제나 일반으로부터 빈축의 대상이었음을 상기할 때쯤 더 교회가 적극적이고 솔선모범을 보였어야 했던 것이다.
60년대가 마지막가는 금년 10월 24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가졌던 「노동문제 대강연회」에서는 사회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명백히 밝혔고 또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확립했다.
이제 우리는 강화도 사건을 거울삼아 그 사건이 가진 복잡한 여러 가지 요인들을 분석 검토하여 우리의 신앙생활을 개선시켜 나가는 것이 현대교회의 사명일 것이다.
▪병인순교자 諡福
2백년 박해의 역사를 통해 우리교회는 수많은 순교자를 낳았지만 그 중에서 79위의 복자밖에 모시지 못했던 것이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병인순교자 중 24위가 다시 시복됨으로써 이제 1백3위의 복자를 모시게 되었다. 이것은 피로써 진리를 증거한 그분들의 영광임과 동시 우리 후손들에게도 큰 영광인 것이다. 그러나 순교자의 정신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점 흐려지고 그들을 현양하는 정성은 사라져 가고 있다.
우리보다 교회역사도 짧고 신자수도 적은 나라에서까지 이미 성인성녀가 수두룩한데 우리는 그들보다 더 자랑스러운 순교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성인성녀 한분내지 못했고 복자수도 많지 못하다.
이것은 오로지 우리의 정성이 부족한 탓이며 지금까지의 복자를 모시게 된 것도 우리들 자신의 힘이 아니란 점을 생각할 때 이것 또한 70년대에 우리들이 해야 할 과제라 하겠다.
◆ 人物(인물) / 許鍾烈 記
추기경 탄생에 主敎(주교)도 豊年(풍년)
가톨릭 世代交替(세대교체)에 큰 期待(기대)
60여년간 受難(수난) 같이한 睦(목) 神父(신부)가고
平信徒(평신도)의 龜鑑(귀감) 張勉(장면) 박사도 逝去(서거)
綺羅星(기라성)같은 人物(인물) 交替(교체)
「로마」로부터 불어온 쇄신의 바람은 60년대의 한국교회를 혼란 속에 휘몰아 넣었다.
『신자는 늘어도 신의 「이미지」는 흐려지고 있다』는 소리가 높아가는 가운데서도 한국교회는 교회법상 모든 보장을 받는 자치적 지위를 확보했다.
60년대에 접어들면서 교계제(敎階制)가 설정되어 노기남, 서정길, 현하롤드 주교가 대주교로 승격되었고(62년) 교황공사가 교황대사로 승격, 초대대사로 쥬디체 대주교가 임명되었다.(66년)
1969년 3월 28일에는 수난얽힌 1백92년의 한국교회사상 최대영광인 추기경이 탄생함으로써 자치교회로서의 교계가 확립, 사랑의 자세로 대화를 통해 사목하려는 자립 교회의 모습을 완전히 갖추었다.
60년대에 배출된 사도의 후계자는 무려 9명이나 되어 「주교풍년」을 이루었다.
전주 한공열 주교를 필두로(61년) 인천 나굴리엘모 주교(61년) 수원 윤공희 주교(63년) 대전 황민성 주교(66년) 원주 지학순 주교(65년) 춘천 박토마스 주교(66년) 광주 권야고보 보좌주교(66년) 마산 장병화 주교(68년) 안동 두봉 주교(69년)가 차례로 성성되고, 대전원주교(64년) 춘천 구 주교(65년) 서울 노 대주교(67년) 청주 파 주교(69년)가 은퇴했다.
한편 성 베네딕또회 왜관 성 다오로 대수도원 초대 대원장에 약관 33세의 오 오도 신부가 선출되고(64년) 청주교구장서리에는 주은노 신부가 선출됐다.
60년대 한국교회의 성직자로서 「매스·콤」을 가장 많이 탄 인물은 역시 노 대주교와 김 추기경.
67년 3월 27일 『건강상의 이유로 교구장직에서 은퇴한다』는 짤막한 은퇴 성명을 발표한 후 경기도 시흥군 안양 「성 나자로 요양원」에서 음성 나환자들과 함께 여생을 보내고 있는 노기남 대주교는 신부로서 12년 주교로서 25년 도합 37년간 명동성당을 지켜왔다.
노 대주교는 그동안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을 이겨냈고 8·15해방직후에는 미군환영 대미사를 드림으로써 『나라가 잘돼야 교회가 잘 된다』는 신념으로 전국의 산파역에 직접·간접 참여했으며 자유당 독재정권에 정면도전하기도 했다.
노 대주교의 후임으로 서울대주교가 된 김수환 추기경은 64년 독일에서 귀국, 가톨릭시보사 사장으로 취임한 이래 「연거퍼 기사를 제공하는」 60년대의 풍운아로 등장했다.
김 추기경은 시보사사장 1년 10개월만에 44세란 좋은 나이에 마산주교로 성성됐고(66년 5월 31일) 2년 후인 68년 5월 29일에는 준공 70주년을 맞이한 명동성당에서 교황대사 로똘리 대주교 주례로 서울대주교좌에 착좌했으며 그후 1년이 채 못되어 세계에서 최연소 추기경이 됐다.
김 대주교의 착좌에 즈음하여 국내 중요 신문들은 『천주교가 40대의 장년인 김 대주교를 착좌케 하여 세대교체를 대담하게 단행했고 김 대주교의 왕성한 활동력과 참신한 시대감각에 기대를 걸어 교회쇄신에 앞장서게 한 것을 높이 평가』했다.
신부들 가운데 제주도에 「이시들 농장」을 창설, 농촌사목의 본보기가 된 한림본당 주임 메크린치 신부가 66년도 5·16민족상 산업부문상을 받아 또한번 화제가 됐고, 62년간 한번도 귀국하지 않고 군국주의 일제(日帝) 탄압과 6·25 등 민족의 수난을 함께 겪으며 오직 사목에만 열중하던 목세영(佛人) 신부가 67년 9월 12일 당신의 말씀대로 『한국 땅의 흙이되어』 감격을 샀다. 66년 6월 4일에는 제4대 부통령이요, 제2공화국 국무총리였던 장면 박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국민의 가슴에 깊이 새기고 향년 67세로 서거했다. 정치가로서의 장 박사는 자유, 민주주의 구현에 심혈을 다했고 전교하는 교회의 평신지도자로서의 장 박사는 민주당정부의 각료 대부분을 영세시켰다. 현정입법부수뇌인 이효상 의장의 교회 내외에서의 역할은 논외로 하고라도 현재 서울대교구 평신도협의회 회장으로 활약하고 있는 현석호 선생(교리연구소 소장)도 장 박사의 영향을 받았음은 말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