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부터 겨울에 꼭 하고 싶었던 일이 하나 있었다. 輕便鐵道로 東海岸의 두메산골을 旅行하고 싶었다. 그러나 몇해를 벼르기만 했지 아직 실행해 본 일은 없다.
東海岸의 두메에는 아직 電燈이 없는 곳이 많이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驛頭에 호롱불을 달아놓고 하염없이 汽車를 기다리는 그런 두메에, 밤중에 혼자 내려 어느 주막에 旅裝을 풀거나 주막도 없는 곳이라면 驛待合室이나 事務室같은데서 금테두른 驛長과 함께 하루 저녁을 지새워보는 것은 어떨까? 낯설은 對話를 나누며 굳어있던 表情들이 절로 누그러지도록 人情을 보내고 받으면서 날이새자 아쉬움을 달래며 헤어져보는 것은 어떨까? 헤어져서는 또 하염없는 旅程에 올라 車窓에 머리를 맞대고 스치는 바깥의 雪景에 눈을 주면서 그리운 얼굴들을 마음으로 더듬어보면 어떨까? 都市에서 얼어있던 마음이 조금은 따스해지고 포근해질까?
東海岸 두메의 겨울은 나에게 아주 낯설고 서먹서먹하면서 마치 거칠은 손등에서 느끼는 그러한 향수와 人情을 안겨주는 것 같다. 東海岸의 겨울旅行은 꼭 혼자서만 가고 싶다. 눈속에 쌓인듯한 아늑한 잠이들면 꿈에 그리운 사람의 얼굴을 생시보다도 더욱더 정답게 볼 수 있으리라. 연탄이 아닌 장작개비에 붙은 아궁이의 불빛도 오랫만에 볼 수 있고, 그 불빛이 또한 내 잠자리를 한결 훈훈하게 해주리라. 나는 샤갈의 그림을 좋아한다. 그의 그림을 보면 人間에 대한 말없는 향수기 용솟음친다. 그는 송아지를 그리고 송아지의 눈망울에 담긴 시골의 집들과 農夫들을 그린다. 山羊이 樂器를 켜는 것을 그리고 天使가 지붕위를 나는 것을 그린다. 結婚式場의 新婦의 가슴에 안긴 선연한 빛갈의, 그러나 수주운 듯이 피어있는 몇송이의 꽃도 그린다. 産婦가 발가벗고 아이를 낳는 場面, 그 곁에 물동이를 들고 섰는 늙수그레한 시골아낙의 表情-거기에도 音樂의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이런 모든 情景에서 나는 겨울을 느낀다. 겨울날의 눈오는 한때를 느낀다. 눈은 사람의 體溫을 따스하게 다스려준다. 휴메니즘은 이리하여 나의 가장 아늑한 살속으로 스민것을 느낀다. 샤갈과 겨울. 겨울과 눈. 눈속에 묻힌 따스하고 포근한 나의 體溫. 나는 나의 體溫을 찾아 겨울의 눈속으로 깊이깊이 잠긴다. 이리하여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싶으나 꼭 한사람만을 깊이사랑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도 된다.
나는 아직 겨울에 登山을 해본 경험이 없다. 겨울에 登山을 해본 經驗者들은 말한다. 땀을 흘리며 눈길과 눈비탈을 걷는 재미. 山頂에서 바라보는 눈에 덮인 山들의 偉容관운치. 거기서 맛보는 포도주 한잔의 잊을 수 없는 香趣. 사람들은 이러한 經驗을 말하면서 나를 겨울山으로 유혹한다. 나도 머지않아 겨울山의 그 偉容과 운치를 經驗하리라. 그러나 거리에서도 겨울은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가 있다. 얼마전에도 첫눈이 내리는 거리를 몇 친구와 어울려 걷다가 「비어홀」로 찾아든 일이 있다. 투명한 유리컵에 麥酒를 따르며 마음맞는 벗들과 불곁에서 閑談을 나누는 것은 우리나이 또레의 하나의 아름다운 風景이 아닐 수 없다. 때로 따끈한 日酒한잔을 두고 말수적은, 그러나 豐富한 表情으로 벗과 어울리는 그러한 人情도 겨울이 아니면 實感이 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겨울이 되니 어릴때 아궁이에 지핀 불빛이 생각난다. 불빛의 아름다움은 역시 나무에 지핀 그것이라야 하지 않을까? 石炭이나 가스의 불은 도무지 불같지가 않다. 그것은 사람이 만든 조작의 불같기만 하다. 어릴적에 본 記憶의 하나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댓쯤 되는 아이들이 둘러앉아 불을 지피고 있었는데 마침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 불속으로도 눈은 자꾸 떨어져 불이 혓바닥으로 눈을 핥아 삼키는 듯하였다. 불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내 나이에서 느끼는 불은 그런 怪物스런 불이 아니고 내 귀에다 속삭이는 내 體溫에 훨씬 密着된 그런 불이다. 겨울이라야 불빛이 비로소 제빛을 내게 된다.
金春洙(詩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