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언 1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커다란 은행나무위에 미완성인 채 엉성하던 석조 건물, 현관에 들어섰을 때 느껴지던 고요에서 오는 그 엄숙, 이렇게 시작된 소신학교의 생활은 무엇이 참된 열심인지는 몰랐어도 그래도 좀더 열심히 살아 보겠다는 노력의 생활이었던 것 같다.
그후의 생활은 항상 내일만 기약하는 미루는 생활, 결심만의 생활이었다고 생각된다.
『대신학교에 올라가며 좀 더 잘해봐야지』
소신학교를 졸업하면서 뇌인 말이었다. 철학과를 마치고 입대할 때에도 똑같은 소리를 되뇌이게 되었다.
『군대에 갔다와서는 좀 더 잘해봐야지는』
군대, 인생의 재생창(再生廠)이라는 군대에서는 그래도 무언가 많은 것을 배우고 체험하고 돌아왔다고 자부하고 싶다.
공의회에서 부르짖는 「인간적 성숙」과 「인격의 원숙(圓熟)」(사제양성율령)에 많은 보탬을 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막상 신학교에 다시 돌아온 후의 내 생활은 또 『잘해봐야지』의 연속이었다.
『부제품을 받으면 좀 더 잘해봐야 겠다』
그러나 부제가 된 후에도 나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내 생활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이 구태의연 그것 이었다. 아니 오히려 옛보다 더 못한 나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늦게야 「막연한 결심의 진리」를 터득한 셈이라고나 할까?
이제 나는 다시 그 막연했던 『잘해봐야지』를 또다시 되뇌이면서 사제품을 받은 것이다.
지금까지의 결심했는 『잘해보겠다』를 그리고 자비하신 눈길로 참아주시고 『어디엔가 쓸데가』있으시다고 마지막 기회를 주시면서 불러주시는 그분의 크신 은총의 힘만을 믿고 다시한번 『이번에는 정말 잘해봐야지』를 되뇌이면서 주님의 제단에 오르려는 것이다.
사제, 온 생애를 통하여 『그리스도안에서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야하는』 사제.
하느님 백성의 지도자로서의 직책을 다하면서도 자신의 일에는 무관심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일에만 골몰하며 평신도들과 협력하고 그들 가운데서 『섬김을 받지 않으시고 오히려 섬기시며 많은 사람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당신 목숨을 버리신』(마테 20·28) 주님의 모범을 따라 봉사자의 정신을 가져야하는 사제.
스스로 풍요하심에도 불구하시고 우리를 풍요하게 하시기 위하여 가난하게 사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자진하여 가난을 택하도록 불리운 사제.
신앙을 저지하는 새로운 장해, 성과가 보이지 않는 노고, 고독의 시련 등 실망의 위험도 당해야 하는 사제(사제율령에서)가 되려고 노력하련다.
사제 생활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다 해도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으리라. 확신하며 다시한번 『잘해보겠다』를 되뇌이면서 이번만큼은 후회없는 『잘해보겠다』가 되어 주기를 기원한다.
그러나 나약한 인간인 나 자신의 『잘해보겠다』는 결심만으로는 사제인 나의 생활이 또다시 보잘것없는 날로 연장될 것이다. 하느님의 끝없는 은총속에서 70만 교우형제자매들의 열렬한 기도와 사랑없이는 세대에 맞는 원만한 사제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때문에 나는 사제서품장에서 기도했다.
『주여, 당신이 원하는 사제로서의 역할을 다 못할량이면 차라 서품이 막 끝난 지금 이 순간에 나를 당신 품으로 데려가소서. 아니면 열심한 신자들의 끝없는 기구로 나의 성무집행에서나 생활전체에 흑점을 갖지 않도록 은총을 주십시오.』
엄벙덤벙 시집간 새색시처럼 피정, 서품, 첫미사까지 치르고난 지금 나는 새신부의 소감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지나간 신학생시절 동안 수없이 되풀이한 『잘해보겠다』를 또다시 뇌까리며 이 『잘해보겠다』가 진정 후회없는 『잘해보겠다』로 영원히 지속되기 위해 교우 여러분들의 기구를 청할 뿐이다.
박영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