刷新(쇄신)의 道程(도정) 平信徒使徒職(평신도사도직) ② 效果的(효과적)인 使徒職(사도직)
久遠(구원)의 希望(희망)으로 奉仕(봉사)해야
바탕은 眞實(진실) 誠實(성실) 正義(정의) 勇氣(용기)
①평신도 사도직의 기초는?
②무엇이 사도직을 효과적이게 하는가?
③사도직의 목적은?
④사도직은 언제, 어디에서?
⑤개인과 공동체로서의 사도직
⑥평신도 사도직을 위한 양성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의 제4절은 모든 평신자들이 자주 되풀이해서 읽어야 한다. 이 구절은 사도직의 기초를 간단하게 다시 이야기하고 무엇이 사도직을 효과적이게 하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교회에 맡겨진 전사도직의 원천은 성부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시므로 「누가 내안에 머물고 내가 그 안에 머물면 그가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나 나없이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요한 15·5)」하신 주의 말씀대로 평신도 사도직의 풍요한 결실은 분명 그리스도와의 생생한 일치에 달려있다.』
그러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머물 것인가? 그리스도 자신이 같은 자리(요한 15)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너희가 만일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속에 머무리라.』 이것은 내가 복잡한 버스를 탈려고 할 때 그리스도께서 나에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라고 요구하신다는 생각이 들면 밀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내옆의 공격적인 사람도 그리스도 나를 사랑함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가 만일 내 오른편 뺨을 치면 다른편 뺨을 그에게 돌이켜 주라는 뜻이다. 그의 말씀에 사랑으로 순명함으로써 그 안에 머물면 그는 우리들이 열매를 맺도록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스도와의 이 밀접한 일치의 생활은 영신적인 도움, 즉 전례에의 행동적인 참여·성사·기도로 양육된다는 것을 교령은 우리들에게 상기시켜 준다. 기도는 조·만과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끊임없는 것이라야 한다.
우리의 사도직은 모든 것 즉 우리의 존재와 생명 그의 은총과 도움을 천주로부터 순간 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이 매순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를 행할 때 효과적이게 될 것이다.
『너희는 말에 있어서나 일에 있어서나 모든 것을 주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통하여 천주성부께 감사드리라.(꼴로 3·17)』
다음에 교령은 우리들이 『즉시 응하고 즐거워하는 정신』 즉 봉사에 즉시 응하고 봉사할 때 즐거워하는 마음을 보여주기를 촉구한다. 그러나 흔히 우리들은 휴일에 소년단을 지도하거나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와 달라고 하면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 우리는 봉사를 거절하거나 느림보 걸음으로 응하는가? 우리는 봉사를 요구하는 인간 속에서 또는 봉사 받을 인간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한다.
『신앙의 빛을 받고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써만,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을 발견한다. …(교령4절)』
이 신앙은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실천되도록 하기 위해 주어졌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를 넓히는데 자신을 아낌없이 바친다.』고 공의회는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들의 생활은(이것은 우리의 생활, 즉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생활이어야 한다.)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현세생활의 시련 속에서도 「현재의 고통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기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로마 8·18)」 생각하며 희망의 용기를 발견 한다』
우리의 사소한 불평들을 반성해보자.
『하느님이 주시는 사랑의 충동을 받아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며… 「모든 악의와 모든 기만과 위선과 시기와 온갖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베드로·전 2·1)」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준다』 체면을 위한 행동과 비방하는 대화도 반성해 보자. 『「우리에게 오신 성신이 우리 마음속에 부어주신(로마 5·5)」 하느님의 사랑은 평신도들로 하여금 그들의 생활 속에서 여덟가지 행복(진복팔단) 정신을 표현하도록 한다.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현세재물이 결핍되더라도 실망하지 않고 풍족하더라도 교만해지지 않는다.』
개인으로서 가족으로서 혹은 교회단체로서 이것은 우리에게 사실인가? 공의회는 복음적인 청빈을 거듭 강조했다.
평신도 사도직 대회에서도 이것만큼 열렬히 강조된 것은 별로 없었으며 기독교 정신은 우리의 생활수준과 우리의 교회기관 내에서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청빈을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이 마구 터져 나왔었다.
그러나 청빈이 그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만이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복음의 청빈은 성부의 안배에 전적인 사랑의 신뢰를 바탕으로 해서 재물에의 애착과 재물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후련하게 해방되는 것이다.
우리주위 사람들의 필요를 사랑으로 깨닫는 것과 연결되어 이것은 우리들을 또한 대단히 실천적인 청빈에로 이끌어 주게 된다.
평신도 사도의 생활에 대해서 교령을 더 옮겨보면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허영을 탐내지 않으며 사람의 뜻보다 하님의 뜻에 들려고 힘쓰고….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언제나 모든 것을 버릴 각오와 정의를 위하여 박해를 당할 각오가 서있으며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끊어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테 16·24)」하신 주님의 말씀을 생각한다. 서로 그리스도교적 우정을 닦으며 어떠한 어려움 중에서나 서로 도와준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 즉 가정주부·학생·사업가·정치가 혹은 노동자에게 제공한 복음적 생활이다. 세속의 수단과는 정반대이기에 그러한 생활은 얼마나 감동적인 증거가 될 수 있겠는가.
복음적 생활은 일상적인 사회적 덕행 『즉 성실성·정의감·진실성·친절·용기를 전제조건으로 해야 한다. 이런 덕행이 없이는 참된 그리스도교적 생활이 성립될 수도 없다.(교령 4절)』 우리의 증거가 흔히 이러한 덕행의 부족으로 실패하게 되는 것은 비신자들에 의해 자주 지적되는 사실이다. 공의회도 우리들을 이러한 덕행보다 훨씬 더 뛰어난 여덟가지 행복에로 부르면서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러나 진복팔단의 생활이 너무 어렵다고 생각 안되는지? 그러나 실상 그러한 생활을 거절하는 것은 우리에게 제공된 해방과 거쁨을 거부하는 것이다. 자케오의 이야기(루까 19·1~10)를 다시 읽어보라.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만남에 의해 그는 돈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되었다. 그가 그 밤 그리스도를 영접한 집은 그전 보다 더 초라한 것이었으나 비교할 수도 없는 기쁨으로 찬란히 빛나는 것이었다. 그러한 기쁨은 다른 사람에게 옮아가게 된다.
교령 중에서도 뛰어나게 훌륭한 제4절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지상생활 중에서 가정을 돌보시고 일에 쫓기면서도 언제나 당신의 아들 천주성자와 결합되어 계셨으며 구세주의 성업을 전혀 독자적인 방법으로 거들어드린』 사도의 모후마리아께 우리자신과 우리의 사도직을 맡기도록 호소하며 끝맺었다. (계속)
梁 수산나(대구가톨릭여자기술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