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年(년)의 발자취] 本堂(본당)·敎會機關(교회기관) 어제와 오늘 ⑤경북 洛山本堂(낙산본당)
時潮(시조)에서 外面(외면)된 閑地本堂(한지본당)
소금배 來往(내왕), 交通要地(교통요지)란 옛말
6·25땐 激戰地(격전지)·避難處(피난처) 慰安處(위안처)
경북에서 대구 계산동본당 다음 두번째로 설립된 낙산본당은 낙동강변에 우뚝서 선량한 농민들의 영육의 샘터로서 낙동강물과 함께 애환의 70년을 면면히 흘러왔다.
1894년 박해의 여운 속에 주민들의 눈을 피해가며 불란서 하가밀로 신부가 초대주임으로 부임, 현 성당 아래 자리에 한옥 한채와 논 열마지기 그리고 대지를 2백50량에 매입하고 선교활동을 시작했으니 당시 낙산의 신자 수는 불과 낙산3동에 두세집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본당관할지역은 왜관·성주·김천·상주·예천·군위·안동·문경·합천 등지여서 봄가을로 공소순회를 떠나면 2·3개월이 걸려야 본당에 돌아올 수 있는 광활한 지역이였고, 낙산만 하더라도 소금배가 드나드는 교통의 요지로 제법 사람들이 모여 살만한 곳이었다.
또한 대구에서도 40여리 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거리에 있어 내왕도 당시의 교통수단으로서는 편리한 고장이다.
그러나 대구서 왜관, 김천 등지로 바로 국도가 개설되면서부터 낙산은 교통과 더불어 지방행정적으로나 교회발전에 있어서 외지로 낙후되고 말았으니 70년 후인 현시점에서 볼 때는 초창기의 본당설정 위치가 부적합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지금도 전기(성당구내는 발전기를 사용하지만) 전화는 물론 우체함 하나도 없고 장도 서지 않으며 구멍가게 몇집이있을 뿐이다. 교통도 정기 뻐스가 하루 두차례 내왕 할 정도이니 정말 도시에서 가까운 거리에 비해 너무도 문명의 이기를 혜택보지 못하는 불편한 고장이라 하겠다.
그러나 본당신자들의 신심생활은 철저했다. 신부가 말을 타고 공소를 찾아갈 때면 공소신자들은 20여리 길을 마중 나와 영접했으며 신부가 거처할 숙소를 도배하기에 분주하였고 그러지 못할 형편일 때는 나무막대기 끝을 뾰족하게 깎아 나무못을 군데군데 박고 거기다 한지를 부쳐 꾸미고 신부가 다녀가면 다 시 한지를 떼 말아두었다가 다음에 다시 쓰곤 하였다고 10여세에 입교하고 후에 복사로 일했던 유일한 생존자 오바오로(85세) 옹은 말한다.
현 성당(건평 1백80평)은 1911년에 부임하여 1944년에 떠난 여빅돌 신부(佛人)가 1923년 착공 1925년에 준공하였고 그때 본국에서 구입하여 성당주변에 심어둔 묘목들이 이제는 무성히 자라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그리고 1949년 부임한 김요한 신부가 시녀회(수녀원)를 창설할 목적으로 지은 흙벽돌건물이 지금은 교리반교실로 사용되고 있는데 6·25이후에는 덕원 베네딕또 수도자들이 왜관수도원으로 옮길 때까지 4·5년간 이 집에서 수도생활을 했다.
또한 극심했던 전란 속에서 대부분의 민가는 불타 초토화 되었어도 이 성당만은 건재하였으니 신자들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피난처가 되었고 위안처가 되었었다.
가장 어려운 때 가장 고귀한 일을 한 낙산본당은 이것 하나만으로도 보람을 찾았다할 수 있겠다.
그리고 북한 괴뢰군에게 점령당했을 때 그들의 무신앙적 잔학상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듯 성당주보 성안나동상은 머리가 총에 구멍이 뚫였다가 다시 수리돼 그대로 모셔져 있다.
15대 본당주임 황춘홍 신부가 부임하고부터 낙산본당은 농촌의 낙후성을 탈피하기 위해 농장에 야채를 가꾸고 돼지를 기르는 등 자활방도를 꾀했으며 현주임 이동식 신부는 수십년간 신자들의 숙원이던 수녀(현재 성체회 수녀 2명)를 모셔 아동교리반과 평신도들의 활동에 활력소를 불어넣고 있다. 그러나 너무도 빈약한 농촌이라 자치운영은 고사하고 베네딕또 수도원의 원조없이는 본당을 유지할 수 없는 형편이라 긴 역사를 지닌 본당으로서는 안타깝고 민망하다고 한다.
지금의 본당관할은 4개 공소에 신자수는 1천4백70여명이다. 그리고 레지오·마리에와 성모회·농촌청년회 등 평신도 활동이 다소 활기를 띄고 있다.
그러나 매년 영세를 받는 수보다도 더 많은 수의 신자들이 도시로 이주하여 줄고 있으니 특히 젊은층의 일손 모자람은 농촌본당의 고민상을 낙산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낙산본당의 특성이라면 다른 무엇보다 신자들의 가족적인 분위기와 단결심이다.
구교우가 많고 전통적인 신심생활이 철저하지만 아집이나 고질적인 인습이 없이 무엇인가 해보자는 갈망이 엿보인다.
그러나 지리적 환경과 생활수단 등 제반 여건으로 봐서 다른 어느 본당신자들 보다 굳은 결의와 각계의 협조가 있어야 하겠다.
역대주임 신부
▲1대 河가밀로 神父 ▲2대 金알릭수 神父 ▲3대 玉 神父 ▲4대 蘇 神父 ▲5대 呂빅돌 神父 ▲6대 睦유리오 神父 ▲7대 安마가리오 神父 ▲8대 申相祚 神父 ▲9대 金요안 神父 ▲10대 柳요셉 神父 ▲11대 崔비안네 神父 ▲12대 毛안스카리오 神父 ▲13대 盧奎彩 神父 ▲14대 宋요셉 神父 ▲15대 黃春興 神父 ▲16대 李東植 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