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年(년)의 발자취] 本堂(본당)·敎會機關(교회기관) 어제와 오늘 ⑥ 木浦(목포) 山亭洞本堂(산정동본당)
全南布敎(전남포교)의 中樞役(중추역) 맡고
6·25땐 本堂死守(본당사수) 하다가
安(안) 主敎(주교)·高(고) 神父(신부) 拉致當(납치당)해
산정본당은 지금으로부터 7년전 광주교구에서는 노안본당(1896년) 다음으로 설립(1899년)된 가장 오래된 본당중 하나이다. 「유달산」과 「삼학도」가 내다보이고 전면은 시원스레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또한 성당문 앞에는 비바람 속에서 선량한 어민들의 뱃길을 밝혀주고 보호해주듯 성모상이 등대마냥 굽어보고 있다.
동상에도 『평화의 모후여 우리 위해 빌으소서』라 새겨졌고…
1966년 5월 현 성당이 낙성되기까지는 마치 중국집처럼 곤색으로 진하게 칠해진 1백67평 짜리 구성당을 개축수리하여 사용해 오다가 현 본당주임인 진요안 신부가 부임하여 건평 2백여평의 성당과 2층 50여평의 사제관과 사무실 그리고 60여평의 교리반과 유치원을 건립했다.
초창기 선교활동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어느 본당에서와 마찬가지로 많은 애로가 있었다.
조알벨도 신부(佛人)가 초대주임신부로 부임하여 10여년간 사목활동을 했을 당시 본당 신자수는 3백여명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6대(1922년~1932년) 방인 신부로서는 처음 朱在用 신부가 부임할 때까지 20여년이란 장구한 세월이 흘렀지만 신자수는 겨우 배로(7백여명) 증가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착실하게 성장한 산정본당은 1952년 유달산밑 목포남단에 경동본당을 설립 분가시키고 1954년에는 진도 해남본당을 1955년에는 일노본당을 그리고 1958년에는 북교동본당 흑산본당을 1968년 3월에는 연동본당을 차례로 설립 분가시켰으니 산정본당은 장자구실을 톡톡히 한 셈이다.
또한 산정본당은 이조 말엽의 천주교교난과 일제와 6·25의 국난 때는 극심한 핍박과 곤욕을 받은 본당이기도 하다. 일제말기 본당주임신부가 외국인이라고(지금도 그러하지만 역대신부들의 대부분이 불란서 혹은 애란 신부이다) 적대시하고 신자들과의 접촉을 제한하며 식량배급을 금했다. 따라서 高토마스 신부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인분지개를 지고 보리농사를 지어 자급자족을 꾀했으며 2차대전이 종전될 무렵에는 그나마도 외국신부들을 전원 강원도 어느 곳에 연금시켜 그중 길 신부(애란人)는 영양실조로 그곳서 세상을 떠났다.
또한 6·25때는 대부분의 신부들이 피난길을 떠났지만 安바드리시오 주교와 高토마스 신부 그리고 吳요안 신부는 어린양들을 버리고 자기들만 떠나 버릴수 없다고 끝까지 본당을 지키다가 괴뢰군에 의해 납치된 후 지금까지 소식없어 세분 성직자가 치명된 것으로 생각하고 본당신자들은 사무실에 사진을 걸어놓고 그 숭고한 사랑을 가슴속깊이 길이 새겨 추모하며 본당의 가호를 구하고 있다.
현재 산정본당 신자수는 약3천여명으로서 3개 도서지방 공소를 가지고 있으며 본당 내에 성골롬바 노병원과 성골롬바노 간호학교가 있어 목포시뿐만 아니라 전남지구 의료사업에 기여하는바 크다.
역대 주임신부명단
1대 趙알베르또 神父 佛人
2대 呂빅몰 神父 佛人
3대 宋스드왕 神父 佛人
4대 간모리치오 神父 佛人
5대 單에밀리오 神父 佛人
6대 朱在用 신부 韓人
7대 宋南浩 신부 韓人
8대 毛빠드리치오 신부 愛蘭
9대 金在石 신부 韓人
10대 朴文奎 신부 韓人
11대 崔德弘 신부 韓人
12대 金在石 신부 韓人
13대 高토마스 신부 愛蘭
14대 孫빠드리치오 신부 愛蘭
15대 安토마스 신부 愛蘭
16대 元요한 신부 愛蘭
17대 都요한 신부 愛蘭
18대 柳그레고리오 신부 愛蘭
19대 毛미카엘 신부 愛蘭
20대 秦요한 신부 愛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