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뜨랑제 시절의 한여름] 피서 커녕 낚시 한번 안가고
錢帶(전대)에 돈 지닌 채 진종일 노동하는 中國人(중국인)
한국 교포마을엔「노새 노새…」노랫가락
발행일1969-07-27 [제679호, 4면]
이맘때면 만리포 같은 고장으로 해수욕을 가거나 설악산 같은 곳으로 피서를 가는게 요즈음 일부서울사람들의 여름맞이 인상 싶다. 물론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이들의 피서라면 건강을 위하는 것이니 듣기만 해도 흐뭇해질 일이겠다.
그렇지만 조국의 근대화가 그것의 서구화로 착각해진 나머지 「미니 스카트」를 걸친 아가씨들과 「히피」족속마냥 길다랗게 머리카락을 드리운게 도련님들이 저마다 「바깡스」를 입에 뇌이는 걸 자랑으로 여기며 살림살이가 걱정스러워 한숨짓는 어버이의 모습엔 아랑곳 없이 산과 바닷가에서 『캐지나 칭칭』보다도 「째즈」와 「트위스트」춤으로 휴가의 나날을 즐기는게 올바른 일로 여겨진다고 하면 이건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 경종이 울려져야 할일. 여기서 나는 저 중국 대륙의 이방인들이 여름 한철을 지내는 이모저모를 본다. 앞길이 바람직한 우리젊은이들에게 하나의 거울로 삼아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여기 녹쓴 철필을 새로이 하고 간추려보려는 것이다.
아침저녁 멀리 지평선에서 해돋이, 해지기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두만강 건너 대지의 벌판을 거니노라면 구름 한점없이 쨍쨍 내려쬐는 땡볕을 구멍난 밀집모자로 받아가며 쉴 생각조차 않고 길다란 호미자루를 두손으로 받치고 서서 반쯤 고개를 땅에 떨어뜨린 채로 남색 아랫도리에다 가슴패기가 들어나게 남색 웃옷단추를 끌러제낀 2·30대 장정들이 이따금씩 허리에 찬 수건을 잡아서 얼굴에 굴러 내리는 땀방울을 훔쳐가며 땅거미가 찾아들 무렵까지 여기저기 한나절 김만매고 있는 모습들이 까마득하게 푸르른 밭고랑 속에서 눈앞에 다가온다.
난 부러운 마음을 가누지 못한 나머지 발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끈질긴 중국국민성을 보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중국인은 중류 계급이 없고 상류계급과 하류계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류 계급에 딸려있는 농민들은 하루 세끼를 그 무렵의 돈으로 쳐서 5전으로 이어가고 있었고 옷가지는 겨우살이 한벌 여름살이 한벌-한해에 두 번 바꾸어 입는게 고작이었다. 그렇다고 동그레미가 없는 건 아니었다. 허리에 감긴 전대(錢帶)에는 그 무렵의 돈으로 몇백원씩은 들어있는 그들이었다. 그래도 여름 한철 빙수는커녕 맹물에 사탕 한 모금을 타먹을 생각조차 안하고 맹승하게 끓인물만 들이키면 지나가는 그들이었다.
내가 30여 성상을 중국에서 겪었지만 그들은 여름 한철 피서는커녕 천렵이니 한번 하는 것조차 본 일이 없었다.
그뿐이던가 「빠리」나 「도오꾜오」엘 가보아도 제나라의 옷과 제나라의 말을 지켜가는 그들이었다. 이른바 「차이나·타운」의 이색풍경은 그들 국민성을 풀이해주는 산증거물이 아니던가? 중국에는 숱한 교포들이 살고 있었다. 내가 살고 있던 간도에는 해방전만치더라도 백만을 넘었다.
멀리 일송봉(一松峰)에 해가 기울무렵 우리겨레들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새마을 철뚝을 거닐며 저녁바람을 쏘이노라면 해란(海關)강변 푸르른 백양 숲새로 희끗희끗 보이는 사람들 속에서 『노세 노세』의 노랫가락이 들려오기가 일쑤였다. 나는 이 노랫가락에 귀를 기울이면서 노래라는 낱말의 어원이 「놀다」의 움직씨(動詞)에서 온데에 생각을 달리고는 우리조상들에게는 놀기를 좋아하는 경향이 짙지 않았던가하는 생각이 들었던 일이 지금도 머리위에 되살아오곤 한다.
어느 백성이 놀기를 싫어 하랴만 우리겨레는 이 나라가 복지국가를 이룩하기 위해서 중국인의 근면하고 검소하고 주체성이 강한 국민성을 배워서 몸에 배게 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