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신선동 성모성당」
『제기랄것 비만 오면 이꼴이야…』 비가 내린뒤 뻘에 진창이 되어 투덜거리는 소리다.
영도(影島)의 교통은 六·二五동란후 상당히 발달된 편이다. 사변전만해도 마차(馬車)를 이용해야 했지만 지금은 시청앞 「영도다리」에서 청학동(靑鶴洞)이나 동삼동(東三洞) 가는 뻐스를 구별하여 제이 송도로 가는 뻐스를 타고 전차종점을 지나 둘째번 로오타리에서 내려 주변에 큰 건물들이 별로 없기 때문에 시야(視野)에 곧 들어올 뿐만 아니라 물어바도 쉽게 가르쳐준다.
신선동(新仙洞)은 사변후 피난민들을 위시하여 타지방에서 이주민들이 정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논, 밭과 산(産)을 허물고 판자집들이 일시에 여지(餘地)없이 들어섰다.
이런때를 같이하여 「고갈산」 중턱에 신설된 신선동 그리스당의 도움이신 성모(聖母)성당은 해방직후 적산건물을 매수코 공소를 설립하여 대청동(大聽洞) 중앙성당과 청학동(靑鶴洞) 중앙성당에 소속하여 오던바 지금부터 십二년전인 一九四九년에 당시 대청동 중앙성당 주임신부로 계시던 <야고버> 이(李明雨) 신부님이 이곳에 성전을 마련키로 결심코 대지 천여평을 매수했다. 그후 一九五一년 서울 성신대학(聖神大學)이 피난(避難)하여 임시 시설을 실비코 약三년간 거주했다. 당시에는 신학교의 신부님들이 계시던 관계로 미사참례에 큰 불편을 느끼지 않았으나 그후 九·二八 수복을 계기로 성신대학이 환도한 이후부터 이곳 교우들은 신부님을 갈원(渴願)했다. 당시 젊은 청년들을 모아 청년회를 조직하여 <스테파노> 이(李正락) 회장을 비롯한 몇몇 간부들이 대구교구(당시 대구교구 관할)에다 청원을 했다. 이 사실을 알게된 당시 청학동(靑鶴洞) 주임신부로 계시던 <비리버> 김(金基奉) 신부님이 당신 친히 지원하셔 신선동 초대주임신부로 부임하였다.
一九五三년초에 현 「남항국민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미(美) 통신부대 미군사병들이 이곳 성당으로 미사참례를 해오던중 불편한 성당건립에 협조할 것을 결의코 성명미상의 특무상사를 위시한 몇몇 미군 사병들이 상부기관에 진정서를 제출한 것이 동기로 구호 건평 七십평짜리 성당을 이룩.
김 신부님은 이때를 같이하여 성모건설원(孤兒院)을 설립코 불쌍한 고아들을 수용시켰다. 이렇게 노력하시던 김 신부님은 오지리 부인회 협조 부산 강안동에 고아원을 신축코 고아원을 이전하는 한편 작년 八월초에 대신동(大新洞)성당 보좌신부로 계시던 <요셉> 이(李炳萬) 신부께 책임을 맡기고 김 신부님은 고아원으로 떠났다.
사변당시 배움의 터전이 되었던 이곳 본당을 맡게되신 이 신부님은 피임당초부터 『놀로온 것이 아니라 일할러고 왔다』고 하시면서 굳굳한 성업 신조 아래 가난한 二천여명의 어린 양들을 묵묵히 어루만지고 계신다.
신부님이 부임하신 이래 성당 구석구석 손이 닿지 않이한 곳이 없었고 현강당을 말숙히 꾸며놓고 머지않아 수녀님들도 모셔올거라는 것.
지금은 직접 교리를 담당하고 계시다는데 운영위원회, 성모성심회, 청년회, 학생회가 조직되어 신부님을 돕고 있다고 하며 레지오 마리에도 산하 七개 쁘레시디움이 있으며 특히 공립국민학교(남항국민학교) 내서 조직된 「황금궁전」쁘레시디움은 교내와 본당의 어린아동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한다.
본당유지들은 한결같이 비좁고 위치가 불편한 성당을 개축하거나 장래에는 옮기기 위해서 기금모집도 고려중에 있다고 하며 지금 성당은 고갈산 「복천암」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이용하고 있다고 하며 물이 귀한 도시에서는 유일한 자랑거리기도 했다.
저멀리 한없는 수평선 푸른바다 굽어보며 조용히 앉은 성전 희망의 종소리는 암흑의 거리를 잠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