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쟈칼타-인도네시아= NC】 「인도네시아」 가톨릭신자들은 이 나라가 전교지방으로부터 독립교구로 승격된 것은 지난날의 교회의 활목할만한 성장과 계속적인 발전의 수단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교황께서는 지난 一월에 이 나라에 총교구를 새로 설정함에 있어 전교 지방관할권(管轄權)의 행정자들을 六개 대주교구와 十七개 주교구의 교구장으로서 본 주교의 지위로 승격시켰다.
「인도네시아의 약 一백三十만으로 추산되는 가톨릭신자 수는 전체 인구 八천六백만 중의 극소수를 차지하고 있고 인구의 九十%가 「모스렘」 교도이다.
그러나 가톨릭이 전체 인구의 불과 一·五%를 차지할 뿐이나 그들은 이 나라의 정치경제 및 문화 분야에서 많은 임무를 맡고 있다.
많은 가톨릭신자들이 제二차 세계대전 후 「화란」으로부터의 독립 쟁취 투쟁에서 활동적인 부문을 차지했으며 따라서 국내문제에 있어서 교회에 대하여 존경받은 위치를 획득했었다.
그들의 행정참여의 한 가지 결과로 거의 대부분의 「화란」인이 추방되었다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수의 「화란」인 선교사들이 이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한 사실이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양호하다.
가톨릭당은 <스카르노> 대통령의 「교도(敎導)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있고 <스카르노> 대통령은 교회에 대하여 융화를 표시하고 있으며 二회에 걸쳐 「성청」을 방문한 바 있다.
가톨릭당 창설 이후 三十七년 동안 당수를 지낸 전 재무장관 <이그나티우스·카시모>씨는 총교구의 신설을 국가의 명예로서 환영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전도가 호전적이기는 하나 주로 정치분야에서 많은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특히 극단적인 국가주의는 현존하는 가장 곤란한 「트라블」의 원인이 되고 있다. 또한 정부는 모든 외국인의 교육을 거부하여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많은 가톨릭 학교들이 영향을 받고 있고 또 다른 법안이 외국인의 병원 고용을 거부하도록 채택됨으로써 이것 또한 교회 기관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
동시에 「화란」인 선교사들은 서부 「뉴기니아」의 지위문제에 걸친 「인도네시아」와 「화란」사이의 계속되는 긴장상태로 인하여 위협을 받아 오고 있다.
드론가지 위험성은 대부분이 회교도인 인구로 보아 「인도네시아」가 「회교」를 국교로 제정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산주의는 아직도 많은 지지자들을 갖고 있기는 하나 반공산주의는 증가하고 있고 공산분자들은 군부내(軍部內)나 혹은 지식층 중에 약간 영향을 미치고 있을 따름이다.
「인도네시아」 내의 교회사를 더듬어보면 중국에 전교하기 위한 「방지거」회 선교사들이 「인도네시아」 몇몇 도서(島嶼)에 머물었던 十三세기에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의 성과는 거의 없고 제二차 전교시대는 一五一一년에 시작되어 그들은 이곳에 약간의 전교소를 설치하고 一五四六년에 성 <후란시스사베리오>가 이곳을 방문했었다.
그러나 전교사업은 「폴투갈」인과 지방통치자 간의 충돌로 인하여 지장을 많이 받아왔고 그것이 끝이고 十六세기말에 「프로레스탄트」 국인 「화란」이 이곳을 정복하자 또 지장이 많이 초래되었다.
二세기에 걸친 「화란」 통치 후에는 신앙의 거의 모든 흔적은 몇몇 적은 곳을 제외하고는 「인도네시아」로부터 소멸하였다.
교회는 「네델란드」가 불란서 「지배를 받은 十九세기초에 와서야 다시 「인도네시아」에 되돌아왔다.
一八○八년에 二명의 「폴랜드」 신부 즉 <제임스 네티센> 신부와 <람벨트 프넷펜> 신부가 이곳에 도착하였다.
「바타비아」의 교회 관할구가 전체 지방에 걸친 관할권을 가지고 一八二六년에 세워졌다.
一八四二년에 감목대리구로 승격되었을 때는 불과 四명의 신부가 있었고 그들의 활동은 「짜바」에 거주하는 「구라파」인 가톨릭신자들을 위하여 수행하는 것으로 제한되었다.
「인도네시아」임의 개종을 위한 노력은 <삐에레 마리에 브랸켄> 주교가 「바타비아 교구장으로 있을 때 비로소 시작되었다.(一八四八년에서 一八七一년)
「화란」 지방정부의 반대와 전교인원의 부족으로 발전은 제한 받았으나 一八五九년에 「예수」회를 주로하여 많은 선교사들이 내도하였다.
一九○二년에 「째쿠리트 하아트」 선교사단과 一九○五년에 「카프친스」가 또 一九一三년에 「디바인 워드」 신부회가 내도하였다. 그들의 노력은 훌륭히 열매를 맺고 一九四○년에 처음으로 「인도네시아」인이 주교로 축성되었고 그가 후의 「세마랑」의 <알버트 소메지쟈프라나타> 대주교이다.
그러나 전교 노력은 二차대전을 통하여 「일본」이 이 나라를 정복함으로써 막심하게 제한을 받았다.
일본은 모든 「화란」선교사들을 구류하고 그중 약 一○%가 수용소에서 사망하였다.
오늘날 「인도네시아」는 一백七十三명의 교구신부와 十九개 수도원에 속한 八백八十五명의 수사신부가 있다.
또한 十一개 수도원에 속한 五백六十二명의 수사와 五十개 수녀원에 속한 三천四백八十五명의 수녀가 있다.
교회는 一천六백五十三개의 소학교 六백三十七개의 중학교 및 三개의 대학을 운영하고 있고 재학생의 대부분이 비가톨릭 신자이다.
또한 六十五개의 병원과 一백三十六개의 진료소를 운영하고 있다.
대부분의 학교와 병원은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