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의 「쟝글」 안에서 의술(醫術)을 통하여 공산주의와 투정하는데에 전 생애를 바친 <토마스 A 두리> 박사가 암(巖)으로 「매모리알」병원에서 지난 一월 十八일 사망하였다.
그의 죽음은 그의 三十四회 생일 다음날 닥쳐왔다.
「뉴욕」대주교 <스펠만> 추기경은 그가 사망하기 하루전 즉 그의 생일날에 박사를 방문하여 그가 이룩하여 놓은 업적을 찬양하고 강복을 베풀었다.
박사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스펠만> 추기경만이 문병이 허락된 유일한 인물이었다. 또한 그의 생일날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축전을 포함한 수백통의 「멧세이지」가 그에게 전달되었고 <아> 대통령은 축전에서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선행을 성취하고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인류를 위한 사업을 하도록 불러 이르켰다』라고 젊은 의학자를 찬양하였다.
대례연사가 「쎄인트 루이스」의 <레오 바이네> 보좌주교 집전으로 「쎄인트 루이스」대성당에서 거행되었고 그의 유해(遺骸〉는 「칼바리」 묘지내 그의 부친 <토마스 A 두우리> 一세와 형 <이얼>씨(두명 모두 二차대전 때 독일군에게 살해되었다) 옆에 안치되었다고 <두우리> 박사는 「쎄인트 루이스」에서 태어나서 「노뜰담」대학에 입학하였다.
二차대전시에는 二년을 해군에 종군하고 제대 후 「쎄인트 루이스」 대학교의과대학에 진학하였다.
一九五三년에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인터언」을 위하여 해군에 다시 종군하였다.
그는 공산주의 북「베트남」(越盟)의 포위상태의 「하이풍」에서 종사하고 공산주의자를 피하여 「월남」으로 피난해오는 六十만 이상의 피난민을 처리하였다.
그는 그의 업적으로 해군으로부터 「레지오 공로 훈장」을 수여 받고<고 딘 디엠> 월남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수여 받았다.
<두우리> 박사는 一九五六년에 「베트남」에서 얻은 경험에서 『죄악에서 우리를 구하소서』를 저술하였고 그것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十五세기 시대의 의술을 현대기술로 끌어올리기 위한 병원을 건립하였다.
이외에도 두 권의 「베스트셀러」 『내일의 끝』 『산을 태운 밤(夜)』을 저술하였다.
또한 고<두우리> 박사는 「아시아」「아프리카」 및 중동지역 내에 九개 의료기구를 설립한 『국제의료협조합회』(MEDICO)를 창설하였다.
그의 사망과 아울러 발표된 성명서에서 「노뜰담」대학 총장 <데오도레 헤스벌그> 신부는 『「노뜰담」대학은 가장 특출한 아들의 손실을 슬프게 여긴다. 그러나 그의 짧은 생애는 전세계 인류를 통하여 찬사를 받을 자기희생과 그리스도와 같은 자비정신의 모든 생활과 죽엄을 예증하였다. 그의 죽엄은 참으로 이 나라의 크나큰 손실이다』라고 말하였다.
또한편 「쎄인트 루이스」대학에서는 동 대학 총장 <파울 레이너트> 신부가 그의 사망 통지를 받자 곧 「로오마」에서 성명서를 발표 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레인너트> 신부는 성명서에서 『세계는 「아시아」에서 고난을 받는 사람들에게 의료원조를 베풀었다는 단순한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수행함에 모든 우리들에게 좋은 실예를 주었다는 보다 중요한 이유에서 <토마스 두우리> 박사를 필요로 했었다』라고 말하고 그의 죽엄을 애석히 여겼다.
(레지스터紙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