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성경에 예수께서 <야고버>와 <요왕> 세종도를 높은 산상(다볼산)에로 다리고 가셔서 거기서 지성지존(至聖至尊)하시고 만선미호하신 천주님으로서의 당신 본래의 모습으로 즉 그 얼굴이 태양같이 빛나고 그 의복이 눈같이 희게 당신의 형상을 변하신 것은 영원하시고 전능 전지전선하신 당신의 모습 즉 당신의 본래의 만선만덕의 모습을 한번 실제로 저들에게 보여주심으로써 미구에 가련 비참하게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당신의 고난이 어디까지나 당신이 자원으로 당하시는 당신 구속사업의 한 방법이요, 또한 천주님이나 동시에 우리와 다름없는 참 사람이신 구세주예수님의 모습이 이렇게 신성하게 변하실 수 있다는 것은 또한 구세주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 우리 사람들도 이후 영생에서 이와 같이 행복하게 변할 수 있다는 즉 신앙인의 영생영복의 표본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그런데 <베드루> 종도는 이 현성용(顯聖容〉의 깊은 뜻은 깨닫지 못하고 다만 그 순간의 행복에만 도취되고 또 그 행복을 놓치지 않으려고만 초조하여 당치않은 요구조건을 제기한 것이다. 즉 주여 『우리 등이 여기 있기가 좋으니 여기 세장막을 지어 주소서…』 세장막을 지어야 될 정당한 이유가 있는지, 세장막을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지… 그러한 전제조건은 문제가 아니다. 다만 당장 세장막을 그 자리에 지어달라는 요구의 동기는 『여기 있기가 좋다. 즉 내가 좋다. 이 좋은 것을 아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다. 단순한 이기적인 충동에 불과한 것이었다. 사람은 물론 본성적으로 행복을 무한한 행복을(천주님과 동일한 행복을) 원한다. 그러나 이 행복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느냐 문제는 이 점에 있는데 우리는 거기까지 올라가는 그 길은 생각하지 않고 그저 욕심껏 자기에게 좋은 것은 덮어놓고 자기 손아귀에 잡아채려고만 하는 것이다.
인간 그 자체 또한 인생의 비극은 바로 이점에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특히 四월혁명 이후 우리나라에는 소위 「데모」사태가 터졌다 .매일 매시 각처에서 별의별 「데모」가 다 일어나고 있다. 모두가 다 정정당당한 요구조건을 내세우고 있다. 그 요구가 부당하다는 것은 아니다. 정당하다고 본들 문제는 그것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요구조건을 달성할 수 있느냐, 누가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되느냐, 도적에게 물건을 뺏기고 그 도적과 도적마진 물건까지 찾았다면 문제는 간단하나 도적놈은 잡았어도 물건은 이미 다 없어지고 말았다든지 또는 도적놈조차도 잡지 못하였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오늘날 우리사회의 데모를 보면 누가 자기재산을 명예를 행복을 가져다 뺏어다 한군데다 산더미처럼 싸놓고 무조건 돌려주지 아니하는 것처럼 이것도 달라 저것도 달라 덮어놓고 모든 불평불만을 일시에 다 해결해 달라는 것 같기도 하다.
무릇 우리가 원하는 소위 행복이라는 것은 남에게 무리하게 뺏겼으므로 해서 찾아내야 할 것도 있거니와 우리자신이 노력해서 새로히 만들어 얻어야 할 것도 있는 것이다. 또 자기 것을 도루 찾는다 할지라도 찾기까지의 수고가 필요한 것이고 찾는 수고가 새로 만드는 수고보다 더 심한 경우도 있는 것이다. 요는 행복이라는 것은 언제나 노력과 수고의 대가(代價)라는 것은 불변의 인생과 인간사회의 원측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현성용의 사실을 당신이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시체를 장사지내고 그리고 마침내 부활하시기전까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엄히 지시하셨다. 예수님의 현성용은 천주님으로서의 예수님 본래의 행복한 모상인 동시에 수고 수난,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희생의 대가로서, 영광스러히 부활승천하시는 당신의 구세주로서의 승리의 미래를 미리 보여주실 것이기도 하다.
여기 세장막을 지어 달라고 그렇게 주님과 한가지로 있는 것이 좋아서 그 행복을 영원히 차지하려고 예수님께 무리한 요구까지 하던 <베드루> 종도가 그 후 어떻게 되었는가. 예수께서 「젯세마니」동산에서 핏땀을 흘리시며 밤새 고민하실 때에는 잠에 취해 저 혼자 예수님과 떨어져 자고 있었고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잡혀 심판과 고문을 당실 때는 『나 예수님을 알지 못하노라』하며 맹세로써 예수님을 배반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는 또 예수님의 참대리자가 된 후는 예수님과 동일한 수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비장한 순교를 하고 이제는 구세주의 제一대 지상 대리자로 그리스도의 교회의 반석으로 천국문의 열쇠의 소지자로 예수님과 이제야 마침내 영원히 영원히 한 장막 안의 행복을 누리시는 대승리자가 되셨다.
수고를 싫어하는 사람들 노력없이 보수만 탐내는 사람들, 더구나 남의 것을 거저 뺏으려는 사람들 현대인의 불행과 비극의 근본원인은 바로 이것이 아닐가.
우리 교우들도 이런식의 신앙생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다. 다 천당에 가고 싶고 또 현세에서도 항상 유복하게 살고 싶고 <베드루>와 같이 「다볼산」의 예수님의 현성용을 즐기기만 원하고 그 행복의 필수조건인 十자가의 「갈바리아」산에는 오르고저 아니한다.
사순절에 성교회에서 교우들에게 대소재를 엄히지키고 극기와 희생과 열심 수계로써 점, 수고하는 생활점 괴로움을 참아받는 때로 지내기를 엄격히 강조하는 근본 이유가 어디 있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나는 길이로다』 그리스도의 일생은 구세주로서의 예수님 한분의 인생력로가 아니다. 구세주의 은혜를 받으려는 모든 그리스도 신앙자들의 부활에로 영생에로 반드시 걸어야 할 인간의 유일한 공도(公道)인 것이다.
丁旭鎭 神父(安城本堂主任 安法中高校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