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빌라의 美人傳(미인전) (21) 인간의 약점은 도속(道俗)이 공통
발행일1961-03-05 [제269호, 4면]
울긋불긋한 굵은 색동비단의 예복을 무릎 아래까지 내려떨친 늙은 가신(家臣)이 의장(儀狀-地位를 表示하는 儀禮用 지팡이)을 위엄있게 짚으면서 존대(尊大)한 걸음으로 앞을 잡는다. 갈색 수도복의 <데레사>는 약간 뒷 떨어져 파란 마뇌(마準) 난간의 하얀 대리석 계단을 조심스럽게 디디고 따라 올라갔다. 넓게 깔린 「후란돌」 융담(絨담)의 장미꽃 무늬를 내려다보면서 그는 정치(精緻) 한 「아라비아」 잎삭무늬로 장식된 「아-취」 복도를 지나갔다. 많은 촛불이 켜진 커다란 덩어리 수정의 「샨테리아」가 <데레사>의 누더기 수도복과 거의 누렇게 퇴색한 해묵은 「베일」을 그윽히 비추었다. 안방문을 들어서니 「카스탈랴」에서 첫째가는 부귀를 누리는 귀부인이 한계단 높은 좌대(座台)로부터 내려와 천주만으로 풍족한 이 수녀를 얼싸 안았다.
이 궁(宮)에서는 만사가 회사했으나 <루이사> 부인은 <데레사>의 일행을 위하여 특별히 화사한 거처를 준비하였다. 인사가 너무 공손하고 생활이 너무 편안하고 환경이 너무 풍족한 것이 <데레사>에게는 오히려 거부하여 새로운 극기거리가 되었다. 까다로운 예의범절이 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루이사> 부인은 자기 지위에 따르는 존대(尊待)로서 구미에도 성미에도 안맞는 간식(間食)상을 받아야 했고 가정부(家庭婦)들과 시녀(侍女)들 사이의 지체 다툼에 어느 편도들지 않으려고 한마디도 조심없이 할 수가 없었다.
<데레사> 자신도 주인마님의 총애 때문에 남들의 질투를 샀다. 그는 공작의 딸로 태어난 그 주인마님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경이 과민해진 그 여인은 잠시반시도 마음 놓고 지날 수가 없었다. <데레사>는 자기가 가르치거나 설교하러 온 것이 아니고 그러한 귀부인이 자기와 같이 약점과 정열을 가졌다면 도리어 자기가 더 배워야 하겠다는 뜻으로 <루이사>를 납득시켰다. 그 귀부인은 수도(修道)하는 여성들도 역시 자기와 같이 약점과 정열을 가졌음을 <데레사>를 통해 살았다. 속인이나 수도자나 인간의 약점이 공통하다는 사실이 그들의 우정을 두렵게 했다. 얼굴이 잘 났고 보석의 무개에 습관된 사람답게 언제나 머리를 신중이 움직이는 <루이사> 부인은 그 검은 상복(喪服)을 입은 모습에 참으로 위엄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겸손하고 신덕이 깊고 친구에게 순진하고 또 다정했다. <루이사> 부인은 기도와 자서전 때문에 <데레사>가 오랫동안 자기 방에서 안나오면 초조할 만큼 서로 떨어져있는 시간이 지루하게 여겨졌다. 주인마님이 수를 놓고 있으면 그 곁에서 시녀 하나가 「성인전」을 읽어주었다. 전에 모르던 새로운 맛이 났다. 휴식한 티가 조금도 없는 그러나 우아(優雅)한 어조로 말하는 <데레사>의 설명에 홀린 것이었다.
<데레사>는 전국에서 제일 멋이 있다는 「톨레도」의 말씨를 배웠으나 자기의 말을 적게 하려고 사양하는 태도는 버리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듣고 싶은 사람이 점점 늘었다. 그리하여 그는 천주를 위하여 또는 자기 「개혁」을 위하여 유력한 인물들을 많이 사귈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에스칼로나」의 공작부인, 「마케다」의 공작부인, 「빌네아」의 후작부인, <후아나> 공주 「메디나쌜리」의 공작부인, 「알바」의 공작부인은 「일평생 그를 도울 친구들이었다. 그러나 <필립 二세> 왕의 비(妃) 「발로아」의 <이사벨라> 여왕과 가까운 <에볼리> 공주와 알게 된 것은 장래의 불행이 있다.
응접실에서 귀부인들이 모이면 자주나오는 극장 이야기, 이런 저런 경기(競技) 이야기, 투우(鬪牛) 이야기가 벌어지면 <데레사>는 의례히 살짝 빠져나와 여러 방을 거쳐 자기 방으로 자취를 감췄다. 하루는 열네살 난 어린 시녀 <마리아 데 살라싸트>가 방문뒤에 숨어 그의 거동을 살피다가 마치 그 문이 제절로 열리는 것 같이 밀고 들어가서 자작시(自作詩)를 <데레사> 손에 쥐여 주었다.
네가 만일 내게 좀 좋은 일 하려거든 내 눈아!
한 방울의 눈물을 마다고 마라.
오로지 눈물만이 위로가 되오니
슬픔보다 즐거움이
두렵나이다.
얽혀 매일 나의 영혼 풀기 위하여
내 만족을 어찌하면 구하오리까?
통고하시는 임이여!
안쓰럽도소이다.
혹독한 편태-모두가
나 때문이로소이다.
<데레사>는 고개를 수그리고 옆으로 돌아선 그 소녀의 얼굴, 리봉이 달린 귀밑머리, 빧빧하게 은실로 수놓은 명주옷이 한눈에 그의 마음에 들었으나 <마리아>를 나무랬다. 『아가, 네가 수도생활을 준비한다는 것이 말짱 경솔한 짓이야!』
그 소녀가 부끄러워 나간 다음 그는 방문을 안으로 걸었다. 그 다음에는 그 집에서 일 보는 다른 여인들이 방문 밖에서 열쇠구멍으로 서로 차례를 다투어 드리다 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불타는 것 같이 말하는 빛이 바로 그 방의 벽을 뚫고 나가 온 궁(宮) 안에 천주의 숨결이 불었다. 그는 언제나 천주와 일치하는 탈혼상태에서 깨어나면 지상으로 다시 돌아와 아랫 층에서 노동하는 비자(婢子)들 과도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그가 그곳에 머무는 동안 <하메트>라는 「터키」인 이단자를 회두시켰고 기민(饑民) 빈민 병자에 대한 동정심으로 그의 『굳은 심정』이 녹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천주께 대한 사랑으로만 보시(布施)를 했었고 자연적으로 우러나는 동정심을 느끼지 않았으나 이번에는 흉악한 병자를 손으로 만져도 징그러운 생각조차 없었다.
그 궁의 문지기들은 남루한 옷을 입고 <데레사>를 찾아오는 손들을 안내하는 일이 예사가 되었다. 어느날 누더기 「갈멜」수도복을 입은 한 「베아타」가 순례장(巡禮狀)을 짚고 대문 밖에서 그를 청했다. <데레사>는 뛰어 가서 그 「베아타」에게 친구(親口)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