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承前】
전쟁으로 황폐해지고 성직자가 부족하며 격증하는 개종자와 입교자로 인하여 많은 주의와 노력이 요구되고 있는 한국에 있어서 전례(典禮)의 중요성은 아직 등한시(等閑視)되고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다보니 전례에 관한 성청의 교서까지도 그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구라파」나 「미국」보다 전례운동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단시일(短時日)에 많은 영세자가 나왔고 따라서 영세준비가 충분치 못했고 각금 표면상(表面上)의 준비만으로 입교한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대부분이 미신자속에서 살고 있고 교회서적을 읽는 자가 매우 드물며 더욱이 널리 알려져 있는 한국교회의 큰 불행의 하나는 부모들 가운데는 자기 자녀에게 가톨릭교육을 지키지 않는 자가 적잖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저 각금 경문을 배우는 정도에 끄치고 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주일마다 성당에 와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듣고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의식(儀式)을 구경하고 남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돌아간다. 벙어리 모양으로 수동적으로 참석한 그 전례 속에 그들의 영혼을 위한 진미(珍味)의 양식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이러한 관경은 마치 산해진미(山海珍味)를 차린 상을 앞에 두고 굶어죽는 사람을 방불(紡佛)케 한다. 그 음식을 굶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먹여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한국교회도 <비오> 十세 교황께서 열어 두신 길인 전례적재생(典禮的再生)의 길을 걸어야 한다.
이러한 일은 주교님들의 충동을 받아 신부와 신자들이 함께 협조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미사경본의 개정은 쉽게 실행될 수 있으나 전례적사목(典禮的司牧)에 관한 개정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책임자와 주교와 본당신부 간에 토의가 있어야하며 점차적(漸次的)으로 실시되어야하고 각 교구뿐만 아니라 각 본당의 신앙감정(信仰感淸)에 순응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서양에서는 一九五八년 九월 三일부 교서가 반포된 후에도 주교들은 그 문제에 관하여 계속적으로 여러 번 훈령(訓令)을 공포했던 것이다. 한국에서도 주교님들의 충동으로 모든 이가 다같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만 성청의 명령이 이행되고 우리나라의 특수사정에 순응하게 될 것이다. 그뿐아니라 一九五八년 九월 三일부 교서가 취급하지 아니한 점에 관하여도 「메디아또르·데이」 회칙(回勅)의 교의(敎義) 를 이해하면서 성청이 장차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 될 다른 개정의 준비도 하여야 할 것이다. (끝)
D · Y · N ·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