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라파」의 어느 나라 대사가 한국을 떠나면서 서울 어떤 회석상에서 곤경에 빠진 한국의 경제대책으로서 유일한 해결책은 산아제한의 강력한 선전이라고 말한 일이 있었다. 그는 「산 푸란시스코」의 감리교회 <파이크> 감독이 말한 바와 똑같이 가톨릭교회를 『비인간적』이라고 비난하면서 『「로오마 가톨릭교회」 당국의 매도는 경제적 후진 국가의 수천만 국민을 단죄하여 비참으로 몰아 넣는다』라고 말했다. 「미국」과 「영국」의 일부 「프로테스탄트」 써클이 선진국가의 인구과잉을 체계적 산아제한을 통하여 예방해야 한다는 그야말로 서로 똑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 「프로테스타트」의 신학자, 의사, 사회학자의 집단인 이른바 『멘스틸드 보고」가 도덕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산아제한을 위해 피임법의 사용을 허가했다. 산아제한을 하라는 선전이 장래에 오히려 더 큰 역할을 할지도 모르는 반면에 이제 전세계를 통하여 홀로 가톨릭교회만이 인위적 산아제한을 굳이 반대하고 있다.
그러할수록 우리는 二주일 전 서울서의 외국기자 회견석상에서 산아제한이 절대적으로 사회문제의 해결방법이 아니므로 한국에서 응용할 수 없다고 선언한 우리 <장 요안> 총리에게 감사아니 할 수 없다. <장> 총리는 인간성을 거스린다는 윤리적 관점(觀点)으로만이 아니라 경제적 및 사회적 관점으로 산아제한을 배척한 것이다. 사실상 산아제한이 아무런 사회적 효과를 이룩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와 반대로 극히 바람직 아니한 효과를 이룩함이 최근 수년간 산아제한법이 사용되는 여러 나라에서 보는 바와 같다.
「독일」의 부인과 의사 <아우구스트 마네르> 박사가 그의 저서 「여성생활의 성숙(成熟) 문제」 (一九五九 뮨헨)에서 피임법의 규칙적 사용이 드물지 않게 병리학적 형태를 취하는 정신적 및 심리적 균형(均衡)을 잃게 하는데 책임을 져야 함을 보여준다. 신경 및 정신 건강과 성적(性的) 정상성(正常性) 사이에 밀접한 연결이 있다. 여성의 성적 정상성(正常性)은 본질적으로 모성(母性)이 되려는 욕망에 있고 안그러면 적어도 임신 가능성의 의식에 있다. 그러므로 피임법 사용은 성적 정상성을 정면으로 거스리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산아제한이 사회적 위험이 되었다. 그것은 생명과 모성에 대한 자살적 전쟁이다. 자녀에 대한 흥미 단절 이야말로 근본적으로 생명의 증오(僧惡)요. 적어도 생명의 포기가 아닌가? 또 유명한 「프랑스」의 사회학자 <드 레스따삐> 교수가 피임법 사용의 결과로 일어나는 심리상태가 남녀 간의 성적 차이(差異)를 읽고 남성을 여성적으로 여성을 남성적으로 변환함을 지적했다. 그 결과로 「성의 혼란」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부성이 되고 모성이 됨으로써 최고점에 이르며 가장 본질적으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는 성욕이 남성이 여성을 물질적으로 부양하거나 또는 여성이 남성을 부양하면서 쾌락만을 특수목적으로 하는 유희(遊戱)가 된다.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산아제한이 보급된 국가에서 이혼율의 증가가 이 관점을 뚜렷이 확인한다. 또 한가지 피임의 위엄은 어느 나라에서 불법적 유산수술의 수가 증가하는 사실이다. 「일본」에서 어느 「앙케트」에 나타난 사실을 보면 피임법을 사용하는 기혼자들이 역시 다른 피임법과 마찬가지로 일곱번의 유산수술을 하였고 그와 동일한 비율이 「미국」에서도 보고되었다.
<드 레스따삐> 교수가 그의 저서 「산아의 조절」(一九五九 빠리)에 인용한 바를 보면 가톨릭교회가 산아조절의 반대자가 아니다. 혼인이 비록 종족의 계속을 제일 목적으로 할지라도 기혼 가톨릭신자들은 자기들의 자녀를 적절하게 양육하도록 마련해야 함으로 이 의무에 합치하도록 인위적 피임법으로가 아니라 자연적 금욕으로 자녀의 수를 조절해야 한다는 사실을 고려아니할 수 없다. 그러한 태도는 인간애(人間愛)의 존엄과 가정의 단락과 또 그 때문에 국민의 힘을 높이 들어 울린다. 어느 「미국」인 저술가가 그의 결혼안내서에 「미국」인이 가축(家畜)의 생산 증식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자녀의 생산 제한에 있어서도 효과적이며 성공적인 백성이 되는 시대가 오리라는 전망을 말했다. 즉 그러한 시대가 오면 반드시 문명의 종말(終末)이 된다는 것이다.
徐基湖 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