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첨례라 하면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업을 완수하신 날을 또한 세상을 그때까지 지배하던 마귀의 어두움의 나라를 쳐이기시고 광명의 나라를 세우신 사실을 기념하는 날이다.
<바오로> 종도께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고린토전서 一五장)
『만일 그리스도 부활하시지 아니 하셨다면 우리의 설교도 헛되고 너희 진실도 헛되어…』라고 하셨음과 같이 예수부활이라는 이 사실은 우리 교회와 우리 신앙을 위해 다른 어떤 사건보다도 중요하고 거기에서 비로소 교회와 신앙의 존재가치(存在價値)를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으로 보아서는 이 세상에 아무리 큰 기쁨이 있다하더라도, 예수부활에 대한 기쁨의 만분의 일에라도 비길 바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이 기쁨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아마 우리가 영성(永生)에의 자신을 가질 수 있게 된데서 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인제 기쁨이 음악으로 어떻게 표현되느냐라는 문제가 나올 수 있게 되겠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떤 원칙, 어떤 규칙을 정해서 말하기란 불가능하고 또한 불가하기도 하다. 다만 고전음악 내지 낭만음악을 중심으로 해서 _거의 대가(人家)들이 기쁨을 표시하기 위하여 어떤 수법을 썼는지를 살펴보면, (물론 예외도 무수히 있었지만) 대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一, 비교적 「템포」가 빠른 것.
二, 조성(調性)에 있어서는 단조(短調) 보다 장조(長調)가 많이 사용된 것.
三, 「리듬」이 경쾌한 것.
四, 선률이 화려한 것.
五, 기쁨의 폭팔을 의미하기 위하여 음향의 폭팔이 있는 것.
등을 말할 수 있다. <바하>는 그의 『Erstanden ist He lig Chist』 『그리스도 부활하셨도다』라는 「코랄」 전주곡을 힘있고 남성적인 「모티브」를 가지고 엮었으며 『Heuttriumphi ert Gttcs Shn』 『성자께서 오늘 승리하시도다』라는 역시 「코랄」 전주곡은 원수를 쳐이겨 짓밟고 개선장군같이 위풍도 당당한 영웅을 연상시키는 씩씩한 「모티브」로 꾸몄다.
부활첨례를 맞이하는 사람의 기쁨을 위에 본 바와 같은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은, 우리가 능히 그 타당성을 수긍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처해있던 그 시대에 알려진 수법을 그 시대사조(思潮)를 통해서 기쁨의 표현에 사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까 말한 과거의 대가들이 사용한 그런 방법이 절대적이고 유일무이한 것이냐 하면 그것은 간단히 그렇다고 대답해 버릴것은 아니다.
인제 부활첨례의 「그레고리안」 성가의 미사곡을 하나하나 살펴보고자 한다. 위에서 본바와 비슷 방법으로 환희가 잘 표현된 곡이 「알렐루야」다.
『알렐루야 우리 바스가이신 그리스도는 희생되셨도다』 그 「텔로디」는 환희와 감미(甘味)로움에 충만하고, 경쾌하고, 또한 긴 모음가창(母音歌唱)으로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없는 큰 기쁨을, 그 감격을 다만 「멜로디」로 충분히 표현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마치, 성악가가 아무리 큰 소리를 내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음악적 성음(聲音)이지, 절대로 고함치는 소리는 아닌 것과 같이 부활에 있어서도 「그리챤」이 가지고 느끼는 기쁨은 어디까지나 순박한 자의 기쁨의 절조있는 표현이요, 절대로 광적(狂的)인 표현은 아니다.
다음 총계경을 보기로 한다.
「이날은 주 내신 날이니 용약하고 기뻐할 지어다. 주께 찬미를 드릴지니 대저 저는 인자하시고 저의 자비는 영원하시도다』
이 곡을 잘 음미해 보면, 우선 가사에서도 보이는 바와 같이 직접부활첨례에서만 느낌직한 그런 감상이 들지 않는다. 거의 비슷한 「멜로디」가, 기쁨과는 반대가 되어보이 연미사 때에도 층계경의 「멜로디」로 쓰이지 않는가? 그 이유인즉 다름이 아니라 부활첨례에는 예수부활로 인하여 인류가 구속되고 따라서 인제부터는 『주안에 사는 즐거움을 누리게』된 것을 노래함이요, 연미사 때는 죽은 이의 영혼이 만일 아직 연옥에 있으면, 어서 바삐 그 벌을 면하고 천국에 들어가 『주안에 사는 즐거움을 누리게』될 것을 우리가 천주께 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내용은 언제나 천국의 복락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선률은 천국에서의 즐거움을 사람이 맛볼 수 있다는 벅찬 감격을 내용으로 하며, 그 기쁨을 벌써 어느 정도 미리 맛보게 한다.
「제헌경」
『천주 심판 하시려고 오시매 땅이 떨다가 잠잠하였도다. 알렐루야』
이 곡은 그 가사가 언뜻 보아 좀 준엄하고 한편 무서운 듯한 「멜로디」를 상상하게도 할 수 있겠으나 이런 생각은 끝에 붙은 「알렐루야」 한마디로 다 사라져버리고 만다. 과연 「멜로디」는 우리에게 조금도 두려운 감을 주지 않고,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가 죄의 멍에를 벗어나 주의 자녀로서의 새 생활을 시작함에 있어서의 굳은 결의와 새 생활에의 기쁨을 노래하는 것이다.
초입경과 영성체경 「초입경」
『나 부활하였으나 너와 한가지로 있노라. 너 내 위에 손을 덮으셨도다. 네 지식이 기묘하게 되었도다. 주여 너 나를 시험하시고 나를 알으시며 나 않고 서는 것을 알으셨도다』
「영성체경」
『우리 「바스까」이신 그리스도 희생이 되셨도다. 성실함과 진실함의 누룩없는 면보로 잔치할지이다』
인류를 위해서 더 기쁜일이 있을 수 없는 축일에 불리우는 첫번째 노래 보통 생각하면 이 노래야말로 화려하고 곡의 속도가 빠르고 수백 수천의 악기가 반주를 하는 등 굉장하고 「떠들석한」 그런 음악이 기대될 것 같은데 의외에도 그렇지 않다. 초입경의 「멜로디」나는 한번을 제외하고서는 (五도 「레」에서 「라」)이내에서 움직이고 그것도 전체를 통하여 「파」음이 대부분이다. 자주 나타나는 이중음삼중음도, 그 특징인 강도(强度)를 충분히 반휘하지 못하고 속도도 다른 때와 똑 같고, 선률의 진행도 대부분이 연접진행(連接進行)으로 되어있다. 전체적으로 고요하기 짝이 없으며, 승리자이신 예수님의 모상이라고는 더구나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이곡을 통해서 우리는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볼 수 있다 - 즉 불안과 어두움의 밤은 지나가고, 아침햇살이 눈부시게 비치는 속에 예수 홀로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고요한 무덤에서 부활하여 천천이 걸어 나오사 천주성부의 귀여워하심을 받으시는-이런 광경을 그려볼 수 없을까?
영성체경도 성격상 초입경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없지 않다. 가사가 말하는 바와 같이 주안에 새로이 탄생한 순진한 자녀들이 잔치상을 에워싸고 화기애애한 속에 천상양식을 맘껏 취하고 있는 모습-이 노래를 부르는 우리도 거기에 한몫을 보고 있는 것이다.
너무 큰 슬픔이 별안간 닥쳐왔을 때 사람이 처음에는 그 슬픔의 큼을 차라리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부활이라는 너무나 엄청난 기쁨이 우리에 닥쳐올 때 처음에는 차라리 그 기쁨을 모르고 있다. 이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두고두고 우리 마음속 깊이 파고 들 것이다.
李文根(가톨릭大學 敎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