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스·콤」의 윤리에 대해서 말하자면 보도의 윤리, 평론의 윤리, 품위(Decency)의 문제 등을 취급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 중에서 다만 평론의 윤리에 대해서만 말하기로 한다.
먼저 공적(公的)인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공익에 대한 책임을 가진 어떤 기관 또는 개인의 모든 공적 활동이다. 예컨대 정부의 시책은 공적인 감사(監査)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정부나 하부 관청의 실정(失政)과 부정(不正)을 드러내서 비판하는 것은 가한 일이다. 정치는 공동선을 위한 것이므로, 국민 앞에 공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이오. 따라서 공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하는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정치적인 이유로서 어떤 개인에 대한 비판을 하게 되는 것은 특히 선거시(選擧時)에 빈번하게 되는 것인데 나라의 어떤 공직을 위해서 입후보를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 후보자의 적격성(適格性)에 관계된 것이라면 드러나지 않은 결점이나 과오를 공포할 수도 있다. 그 이유는 공동선이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오. 또 입후보자는 이를테면 사람들에게 자신의 적격성을 비판할 권리를 승인하고 나선 것이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자기에게 공직을 맡겨 달라고 청하면서 다른 후보자와 겨누어서 선거에 출마한 이상은 당연히 그러한 조사와 비판의 권리를 유권자들에게 인정하고 나선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도 독자들의 흥미나 어느 정당의 승리에만 급급하여 입후보자의 자격 측정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을 분별없이 모조리 드러내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물론 어떤 사실이 선거목적을 위해서 보도할만한 것인가 하는데 대해서는 건전한 상식과 각자의 양심적 판단을 따라서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보도와 비판은 전체적이오. 공정한 것이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사감(私感)이나 당리(黨利)에 지배됨이 없이 사실의 전모를 충실히 전해주고 객관성을 가진 자주적인 논평을 가하도록 할 것이다. 객관성 있는 권위있는 논평을 가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자기가 취급하는 문제를 충분히 이해하고, 거기에 관련된 원리원측을 잘 연구해야 한다. 깊은 연구와 조사가 없이 피상적인 관찰과 무정견(無定見) 한 맹종으로써 남의 의견을 적당히 비교 절충하여서 자기의 주장을 세워 보려고 하는 것은 양심적인 평론가의 태도라고 할 수 없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점이 있으면, 차라리 그대로 문제를 제시해 주는 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더 넓은 토론과 연구를 위해서 공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엄정한 비판의 태도는 표현방식에까지 주의를 기울이게 마련이다.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는데 있어서도 그 표현이 건설적이오. 동정적일 수도 있고 또는 그와 반대로 파괴적이오. 선동적일 수도 있다. 어떤 정부기관의 시책을 냉정하고도 논리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책을 맡은 고위 관리의 인신공격을 한다든가 또는 어떤 실정(失政)을 반박하는 것이 아니고 그에 관계된 사람을 야유하고 중상하려는 것은 모두 건설적 비판의 태도라고 볼 수 없다.
비판의 윤리를 그르치지 않으려면, 자기 평론이 독자(讀者) 사회에 어떠한 반응을 일으킬 것인지를 미리 생각해 보아야 될 것은 물론이지만, 그보다도 먼저 자신이 언제나 진리와 정의와 애덕을 존중히 하고 실천하는 훈련을 쌓아서, 스스로 말하고, 쓰고 행하는 모든 것이 항상 참되고 건설적이오. 거룩한 것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의 현실 -그 안에는 추악한 것도 없지 않다-을 소재(素材)로 하여 어떻게 하면 참으로 가톨릭적인 소설을 쓸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프랑소아·모리악>이 대답하기를 『소설가가 성인(聖人)이 되는 수밖에 없다』고 한 말은 여기서도 우리가 깊이 명심할만한 적절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尹恭熙(「경향잡지」編輯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