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가톨릭 대표적 철학자 신학자이며 애덕의 사도이던 <이와시다> 신부(岩下壯一)의 업적을 찬양하는 그의 전기(傳記)와 저작의 전집출판(全集出版)이 그의 애제자인 「도오꾜」상지대학 경제학부장(小林珍雄) 교수에 의해 계획되고 있다한다.
<이와시다> 신부의 전기와 저작집의 편집을 맡게 될 <고바야시> 교수는 그때 一九二七년 <이와시다> 신부가 동대(軍大) 안에 가톨릭연구회를 세웠을적부터 알게 되었으며 그 기회에 가톨릭신자가된 분이다. 그 후 <이와시다> 신부의 문필활동을 도왔고 북지(北支)시찰에까지 동반하는 등 신부의 인격 그리고 사상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분의 한분이다.
대개 출판의 구상은 다음과 같다한다.
岩下壯一全集 - 第一卷哲學入門 第二卷 神學入門(上) 第三卷 神學入門(下) 第四卷 敎父研究 第五券 中世思想 第六卷 信仰의 遺產 第七卷 病의 探究 第八卷 隨筆 第九卷 日記 書簡. 別冊岩下壯一傳이라 한다.
<이와시다> 신부의 약력
<이와시다 소오이찌>(岩下壯一) 신부는 一八八九년(明治 二五년) 九월 十八일 관서계(關西財開》의 <岩下淸周>씨 장남으로 태어나, 一九○一년 효성중학시대에 <엑끄> 신부에게 <프랑치스꼬·사베리오> 본명으로 영세했다.
一九○五년 구제(舊制) 일고(一高) 문과에 합격했으나 소요(所要)의 연령미달로 일년간 입학이 연기되어 다음해 六년 입학, 모교 효성에 가톨릭 문고(文庫)를 설립하고 가톨릭연구회를 세워 그 뒤 이것이 모체가 되어 공교(公敎) 청년회로 발전했다.
一九○九년 동대문학부 철학과에 입학 동 十二년 졸업·은사(恩賜) 은시계를 받았다. 대학원서 연학 동 一五년 七고(高) 영어 교수를 지내던 중 동 一九년 문부성 재의연구유학생으로 도구(渡歐)「빠리」 「루반」 「런던」 그리고 「로오마」서 연수하던 중 소명(召命)을 입고 一九二五년 六월 「베네띠아」시에서 <라폰띠스> 추기경에 의해 사제서품을 받고 동년 十二월 일본으로 귀국했다. 귀국후 「도오교」 「오모리」에 가톨릭연구사를 창설·붓과 강의로 포교활동을 개시·一九二七년 연구사 안에 사무소를 두고 동대 가톨릭 연구회를 창립 지도신부가 되었고 二九년 七월 일본 가톨릭 신문사의 전신(前身) 교우사사장(敎友社式長)·동 十월 가톨릭중앙 출판부 위원에 임명·주로 잡지『聲』을 경영했다.
一九二九년 공교대신학교 교수로 「聖會史」를 담당하고 방인사제 육성에 힘썼다. 그리고 다음해 가톨릭 사상강좌를 담당했다.
一九三○년 十一월 신산복생병원(神山復生病院) 六대 원장으로 고 <도왈·더·레재> 신부의 뒤를 이어 매년 그 당시 돈으로 一만원씩을 던저 경영난과 싸우면서 十년 간을 문둥이의 아버지로 구라사업에 헌신했다.
一九三五년 재단법인 성「필립포로」를 설립 이사장으로서 학생의 육영사업에 진력했다.
三六년 신앙훙포회 일본대표위원 三八년 일본 가톨릭 신문사 고문 「가톨릭」 편집장 동년 四월 전국교구장회의의 결과 가톨릭 신문사 경영을 담당했다. 동년 『聲』지의 편집장 취임.
一九三九년 十一월 일본 가톨릭 신문사와의 제관계를 사임 동년 九월 복생병원장을 사임하고 동 제단법인 이사장을 맡았다. 그해 十월 흥아원 화북연락부(興亞院華北連絡部) 초청으로 북지 가톨릭 시찰로 도지(渡支), 병을 얻어 동 十一월 十一일 복생병원으로 귀환 동 十二월 三일 늑막염에 복막염을 병발하여 영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