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61) 全州(전주) 聖心女中高(성심여중고)
道內(도내) 모범교로 進展(진전)
70여년전의 女學堂(여학당) 後身(후신)
한때는 운영난에 허덕였고
발행일1961-04-02 [제273호, 3면]
우거진 숲을 창앞에 끼고 하늘높이 가리운 성문을 바라보면서 높고 푸른 하늘가에 우뚝히 솟은 아담한 사층건물이 바로 성심여중고이다. 두개의 백색선을 두른 흙색 「새-라」복으로 말쑥히 차림을 갖춘 학생이 이 학교 학생들이다. 「진, 선, 미」의 교훈으로 도의 정서 생활인을 육성하는 티끌하나 없이 단장된 성심여고는 일찍 七십여년전 「프랑스」 신부 XAVERIUS BAUDOV-NETMA가 지금자리에 여학당을 창설하였고 1九三八년에 해성국민학교를 창설하였다.
그 후 一九四六년에 성심여학원으로 발족하여 초대원장에 이상화 신부가 취임하였고 一九四八년에 전주성심여자중학교로 정식설치인가를 얻었다.
一九五二년에는 성심여자고등학교 인가를 받고 비로소 여중고를 병합한 여성교육의 본격적인 기도에 오르게 되었다.
예수성심을 주보로 모시고 여중으로 발족한 것도 불과 十五개 성상밖에 안되는 짧은 역사이지만 천주님의 안배 교직원의 불굴의 용기와 노력의 결합에서 교실수 四십여개와 총건평수 一천五백평에 달하며 학생수, 一천五백명을 육성하고 있는 것이다.
약一천七백명의 졸업생을 내고 있는 당 교는 자신과 민족의 불가항력적인 六·二五의 참상과 꼬리를 물고 오는 빈곤과 재난 등으로 때로는 학교 운영도 암초에 부닥처 직원들의 봉급조차 지급하지 못한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한다.
그러나 헐벗고 굶주리며 배움에 허덕이는 학생을 위하여 불굴의 용기와 성실 인내 자유와 정의의 건전한 원리에 입각한 애국애족사상의 고취는 마침내 성취되여 지금은 도내에서도 가장 입학경쟁률이 심하고 모범학교로서 면모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한때는 배구와 탁구로서 또 음악 지금은 문학 미술 등등으로 전국 각지에서 으뜸의 영광을 획득하여 그의 명성을 떨치고 있으며 사재간의 가족적인 오붓한 친목이 깃든 당교의 풍모는 타의 모범이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새로운 이념을 받아들이고 미사려구(美辭麗句)와 같은 허식을 경멸하여 그것에 대하여 고려할 수 있는 역량을 내포하고 있는 믿음직한 교사 진영은 타의 구감이 되고 인류의 명일을 위한 상아탑 건설이 기대되는 바 크다 할 것이다.
■ 김규승 校長
노련하다는 것을 유일한 밑받침으로 삼은 기성시대에 도전하는 약관 성심여중고교장 김승씨(당년 四十四세)는 약십이년전 一九五○년 六월 十六일에 동 교 三대 교장으로 발영을 받았다.
당시 三十三세의 젊은 몸으로 취임한지 몇일안되여 六·二五란 공산침략으로 학교는 유린당하였다. 그러나 그 끈기있고 믿음직한 젊은 <프론티어>의 풍모는 굴치 안하였고 늘 손에 쥐고 다니는 묵주알은 깨끗치 못한 분야를 비상하게 최신하며 목적에 관하여 분명코 담백하였을 것이다.
백사장에 억센 변혁의 풍조가 과거나 현재를 휩쓰는 현시대에 그의 탁월한 교육자적인 역량은 동 교의 발전에 공로가 지대하였으며 그의 박력과 결단성은 젊음에서 오는 소산이였을 것이다. 외적으로는 어느 때나 소박한 옷차림으로 허식을 버리며 내적으로는 지식과 창의력이 풍부하며 그의 철두철미한 지도감독은 학생들의 질적 향상에 뒷받침이 되였고 내일의 사람에 양보할 수 있는 아량과 겸손한 성격은 설하교사의 구감이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