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왕복음」 十一장을 보면 수난하시기 전 예수님 일행은 「베타니아」에 사는 병든 <나자로>의 집에 초대 받은 일이 적혀 있읍니다. 그때 종도들은 『주여, 지금 「유데아」인들이 당신을 돌로 치고저 하는데 거기로 가지렵니까?』라고 만류하였으나 예수님께서는 용감하게 길을 떠나셨읍니다. 다른 제자들은 선듯 따라 나서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데,<도마>종도가 『우리도 가서 스승과 함께 치명하자』고 대담하게 나서니 다른 제자들도 그리스도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마지막 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이같이 용감하던 <도마> 종도가 오늘(사백주일 성경참조)와서는 돌변하여 고집쟁이가 된 것은 수난정사(釘死)의 비극이 있었기 때문이었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운명하신 후 <도마> 종도는 다른 종도들과 함께 행동하지도 않고 지내왔으므로 자연 그들이 주님의 부활을 보았다고 말해도 그는 곧이듣지 않고 『그 손에 못 박힌 자리를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구멍에 넣어보고, 내 손을 그 옆구리 창구멍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우겨댔던 것입니다.
학식 많고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 바칠 각오까지 했던 <도마> 종도가 며칠사이에 아주 딴 사람으로 변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단 열두명 밖에 안되는 종도 중에 <도마> 종도가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되겠읍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신자 중에는 몇백 몇천명의 <도마>가 있을 것입니다. 한때는 성스러운 감격에 잠겨 그리스도께 대한 열렬한 신앙을 고백하던 사람이 갑자기 마음에 의혹이 일어나 불신하는 사람으로 변절하는 것을 우리 주위에서 흔히 봅니다.
그 이유로써 우리는 두 가지를 들 수 있읍니다.
첫째로 처음의 신앙심이 비현실적이었다는 것을 들 수 있겠지요. <도마> 종도만해도 예수님이 설마 악당들 손에 죽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며, 오히려 이 세상에 「유데아」왕국을 재건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그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둘째로 마음에 실망과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자 <도마>는 동지인 종도들을 떠났다는 경솔한 행동이 그의 불신(不信)의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누구의 마음에나 어둠과 의혹은 생기는 법입니다. 우리는 그런 심경의 변화를 느낄 때 결코 교회를 떠나 냉담해서는 아니되겠읍니다. 그런 유감에 사로잡혔을 때일수록 더욱 더 기구하고 분발하여 천주께로 접근해야 하겠읍니다.
물론 보지 않고 믿는다는 것이 단순하고 어리석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덕이 맹목적으로 믿는다는 것이 아니요. 지능을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덕을 지능의 태만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참된 신덕은 사람의 모든 힘을 기울여 끝까지 찾고 또한 믿기로 계약하는 것입니다. 참된 신덕은 천주님을 보다 낫게 섬기고 보다 더 잘 알기 위한 것입니다.
이 경우에 사람은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설명을 요구하고, 천주께 반항하지 말고, 인내력을 가지고 꾸준히 연구하고 노력할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가별> 천신이 천주의 모친이 되실 것을 보고할 때 겸손되이 질문을 하셨읍니다. <도마>는 그렇지 않았읍니다. 악착같이 증거를 요구했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만족을 시켜 주셨으니 오늘 복음성경에 나오는 바와 같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고 그 손의 못구멍에 손을 넣으면서 『오! 내 주여 내 천주여』하고 외친 <도마> 종도의 감격을 본받아 우리도 신덕이 식어갈 때 싱싱한 신앙심을 소생시키기 위해 『오! 내 천주여 내 천주시로소이다』를 되풀이합시다.
그러면 주님은 <도마>에게와 같이 우리에게도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도마>야 너는 보고야 믿으니 보지 않고 믿는 이는 진복자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이는 영원히 살리라』
金玉均(바오로) 神父(서울교구장 비서 겸 출판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