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만二개월간 행방(行方)을 몰라 이목(耳目)을 집중시키고 있던 진주 장재리 주임이던 고 <베드루> 김(金命濟=六十七歲) 신부님의 장례식은 지난 二월 六일 오전 十一시부터 부산주교좌본당 중앙천주교회에서 급전(急電)을 받고 래부(來釜) 한 <바오로>, 노 서울교구장, <안드리아노> 원 대전교구장을 비롯해 四十여명의 신부 三十여명의 각회 수녀 진주 장재리(長在里) 교우 二十五명과 一천여명의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요왕> 최 부산교구장의 집전으로 엄숙히 거행되었다.
十一시 정각 영전에 조화(弔花)와 엄숙히 흐르는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의 성가에 김 신부님 영혼은 주의 품에 안기우듯 말없이 안치되어 있었다.
미사가 끝난 다음 十二시 三十분 메리놀병원 엠브랜스에 유해를 모시고 二十여대의 따르는 차는 三十여리밖에 떨어진 용호동(龍湖洞) 천주교 묘지로 향(向)했다. 끄칠줄 모르는 연도문 『주여 나 깊고 그윽한 곳에서 네게 부르지지나이다 네 귀를 기울이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二시 정각 <요왕> 최 주교님의 사도예절로 하관되었다.
그간 길을 잃고 마산(馬山) 행여자 병사(病舍)에 수용 도중 노쇠와 호흡곤란(마산시 지정공의 진단결과)으로 지난 十二월 十三일 하오 五시三十분경 주의 품에 선종하신 김 신부님은 일찍 충남 서산(瑞山)군에서 독신으로 출생하여(一九○八) 사제 승품후 대구교구로 부임하여 진주 문산(文山)교회 주임신부로 부임하였다. 당시 김 신부는 바쁜 성무의 틈을 타 배명(培命)학교를 설립했다. 제일차 세계대전 때는 서울교구로 전출하여 한국(당시 조선) 최초로 황해도감목대리로 임명받고 사회사업과 교육사업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우수한 수녀들을 양성시켜 각 교회마다 배치시켜 부족한 신부의 손을 돕게했다. 해방 二년전 전남(全南)으로 전임 二년후 다시 대구교구 거창(居昌)으로 전임하여 六·二五 동란을 당하여 괴뢰로부터 많은 수난을 겪었던 것이다.
一九五六년 七월에 진주 장재리본당에 피임하여 임종에 이르기까지 한서(寒暑)를 붋문하고 병상에 누어본 적이 없었고 미사한번 결(缺)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김 신부님은 한국신학교 제일회 졸업생이며 한국에서 가장 고령신부로서 공적도 다대하다.
고 <김> 신부의 유가족으로는 상주(上州) <마리아> 김(金令順=41) 동정녀 뿐인 것 같다.
전기 김씨는 六년전에 만난 것이 최후였었다고 하며 김씨는 지난 四일 꿈에 고 김 신부가 『내가 지금 부산주교관에 있으니 만나려면 이리 오라』고 하여 이상히 생각하고 왔다 하며 눈물을 끝이지 않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