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64) 大田(대전)교구 合德(합덕)본당
치명자의 본거지
完全(완전)한 천주의 마을
金大建(김대건) 神父(신부) 나신 고장
신부 七(칠), 수녀 50 신학생 九명 輩出(배출)
발행일1961-04-23 [제276호, 3면]
지금으로부터 九十여년전 병인년 대박해는 그 규모가 크고 범위가 전국적이어서 무수한 순교자들을 내었다. 그당시 「내포」라 부르던 호서(湖西) 지방은 곳곳이 치명자들의 피로 물들어진 천주의 보고가 많은 지방이다. 그중에서도 천주를 위하여 무수한 곤난과 악형(惡刑)을 받아가면서도 거룩한 신덕을 들어내고저 성혈을 뿌리며 치명한 순교성지를 만들어 낸 곳이 바로 이 「내포」의 중심지가 되는 합덕(合德)인 것이다.
한국초대 제二 그리스도 <안데레아> 김(金大建) 신부님의 탄생지가 바로 이곳 「솔뫼」(松山里)이고 一八六六년 치명하신 <안또니오> 안 주교님과 여러 치명하신 신부님께서 피신하신 곳이 바로 현재 합덕본당 신리(新里)공소이며 홍 신부님과 이 신부님의 산소가 이곳 합덕본당에서 서북편(西北便)으로 약三키로 지점인 「황무실」(黃毛里)에 있으며 홍 신부님과 이 신부님은 박해시대에 병으로 이곳에서 선종하셨다고 전하고 있다.
연대와 인명 지명 「외우기(?)」에 특별한 재능을 가져서 교구내 신부사이에도 인사과장이라는 애칭으로 통하는 합덕본당 주임 <바오로> 박(朴魯烈) 신부님은 굼굼히 여기는 이곳 성지에 대하여 마치 묵주신공때 성모경을 외우듯이 『좌알좌알』 내려 외운다.
그러나 적고 부드러운 음성과 안경너머로 보이는 양눈에는 문자 그대로 『인자하신 신부님』이라는 것을 첫인상에 느끼게 하였다. 합덕천주교회(주보 聖家)는 一八九九년 <레오> 남 신부가 주임으로 부임하므로써 설립되었고 一九二九년 <비리버> 백 신부가 H형인 현 성당을 신축하였으며 一九五○년 제八대 주임으로 지금의 박 신부가 부임하여 현재에 이르렀다고 한다.
한국성교회이 발생지라고도 볼 수 있는 이곳 합덕본당 둘레에 一九○○명이 되는 주민이 살고 있으나 그중 외인은 단 三세대(이것도 현재 전부에 비중)로서 이곳에는 외인은 살 수가 없다고 한다. 이유인즉 이곳지역사회가 농사인만큼 농사철에는 서로 『품아시』를 하여야 하는데 외인은 그것이 안되며 또한 교우들이 외인이라고 부르는데 그만 입교하던지 그렇치 못하면 타지방으로 이사를 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니 이 고장이야말로 완전한 영적 천주의 나라가 된 셈이다.
치명자의 피를 직접 이어받은 고장이라 그런지 역대신부님들의 감화가 컷던지 이것은 천주만이 아실 일이지만은 동 본당은 성소율이 많은 것이 특징으로서 그간 七위의 신부와 五○명의 수녀가 나왔다고 하며 현재로 대신학생 三명 소신학생 六명이 수학중이라고 한다.
또한 신자들의 신심생활은 활목한바 있으며 매월 첫첨례 六을 지키는 성시회원(聖時會員)이 약二백명이고 「성프란치스코 제三회 회원」 一○○명이 있다고 한다.
평신사도직으로서는 四○여년전부터 「안나회」(현재 회원 八○명)가 있어 서로 영육간의 일을 돕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천주교회의 미덕인 「구진일」 통하여 전교에 주력하고 있으며 특히 二개의 성인 「쁘레시디움」의 활동은 전교에 냉담자 회두에 주당(週當) 의무시간 二시간이 아니라 행동단원들은 직접 점심을 싸가지고 아침 일찍부터 방문하고 밭맬 때 같이 매주고 모심을 때 같이 심어주며 우선 인간적으로 사위어놓고 좋은 표양으로서 전교를 하자니 자연 그 활동시간은 주당 二十여 시간을 초과하는 것이 한두번이 아니라고 한다.
一八九九년 설립된 합덕천주교회는 그후 一九二八년에 예산본당(현신자 三,六三一명)이 분리독립하고 一九三七년에 단산본당(三,二一六명)이 독립, 一九三九년에는 당진본당(二,五二二명)이 독립하고 一九六○년에 운산리 버그네본당(一,八○○명)이 독립하므로써 현재 합덕본당은 신자 二,七○○명으로서 총 一三,八六九명의 천주의 의자 총본산인 「내포」의 중심이 합덕천주교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