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성경에 백부장에 대한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것입니다. 그는 착한 사람으로서 고용인을 마치 자식처럼 사랑하는 분이였읍니다. 『주여 내 종이 반신불수병으로 집에 누워서 위중하게 앓나니다』하면서 예수의 도움을 청하였읍니다. 그때에 예수께서는 『나 가서 저를 낫게 하리라』고 하시는 대답을 듣고 그는 더욱 겸손되이 『주여 너 내집에 들어오시기에 나 합당치 못하오니 오직 한 말씀만 하소서 곧 내 종이 나으리다』고 대답하였읍니다. 그때에 이 대답을 들으시던 예수께서는 기이히 여겨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대 『이스라엘에서 이런 신덕을 아직 얻어 보지 못하였노라』고 극구 찬양하셨읍니다.
예수께서는 무슨 영적을 행하실 때에는 반드시 굳은 절대적 신덕을 전제조건으로 두셨읍니다. 즉 『너 이것을 믿느냐』 하신다든지 하시고 영적을 행하신 후에는 흔히 『신덕이 너를 구하였나니라』 하셨읍니다.
예수께서는 이와같은 절대적 신앙을 당신 제자들에게만 요구하시지 않으시고 오직 천주 만대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뒤를 따르는 모든이들에게도 요구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에게도 이와같은 신덕을 요구하십니다. 『믿고 세를 받는 자는 구령할 것이오 믿지 아니하는 자는 죄로 판단함을 받으리라』하신 말씀은 직접 우리들에게 하신 말씀인 동시에 위에서 말씀드린 절대적 신앙을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신덕은 어떠합니까. 절대적 신앙입니까 조건부의 신앙입니까. 각각 양심의 소리를 들어 보기로 합시다. 내 육신이 편하고 사회생활이 내게 고마울제 즉 아무 풍파도 없이 순풍에 돛을 달았을 때는 천주를 굳이 믿고 열절히 공경하다 가도 혹 가다가 조고마한 즉 약간의 생활난이라든가 사소한 사회적 타격때문에 주를 떠나거나 혹 아주 떠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천주를 원망하고 의심하는 변변치 못한 신앙이 아닌가 자세히 생각해 볼 것입니다.
이제 범위를 좁혀서 내 개인의 내적 생활면을 살펴 봅시다. 각 개인이 당하는 가지가지 유감 사욕 편정에서 일어나는 그릇된 요구 이것이 모두 내 구령의 항로를 위협하는 한가지 풍파입니다. 인생이 칠십이 고유히라 오래산다 해도 불과 육칠십년밖에 살지 못할 이 육신의 편이를 위해서 보배로운 신덕을 저버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소한 가정불화로 가정을 하직하고 제이의 신가정 아니 불법가정을 구성하는 남녀 청년 장년들의 신덕이란 보잘것 없는 풍전등화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물질에 마취되어 불법행위를 거듭하며 연고없이 주일과 파공첨례를 굴하고 사욕에 끌려 도덕적 도탄에서 방황하는 가련한 옛신자들의 신세는 비참함니다.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이시여 우리들은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당하는 모든 난관을 두려워하지 말고 용맹히 우리 신덕을 보존해야만 우리가 이 세상을 하직하는 날에 성 바오로 종도의 말씀과 같이 『나는 이미 좋은 싸움을 싸우고 달을 길을 달았으며 신덕을 보존하였노라. 이외에 의덕의 화관이 내게 예비되었나니 공의한 심판자이신 주 저날에 이를 내게 주시리로다』 할 수 있겠읍니다. 아멘.
李鍾淳(서울 明洞大聖堂 補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