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52) 부산진본당
본당운영은 자치제
45명 회장이 손발
발행일1961-01-22 [제263호, 3면]
지방(地方)으로 갈수록 부산 광복동(光復洞)이나 남포동(南浦洞) 보다도 더 널리 알려진 곳은 범일동이다. 부산이 공업지대라고 하는 이곳은 조선방직(朝鮮紡織), 국제고무를 중심으로 국산품 생산 근거지이다. 부산 국제시장을 한국의 외래품시장이라고 하면 범일동시장은 국산품시장이라고 할만치 한국의 생산품이 집결되는 곳이다. 뿐만아니라 둉단, 용호, 남천 등지에서 잡히는 생선도 이곳시장으로 밀려든다.
범일동에서 서면(西面)과 해운대(海雲臺) 방향으로 분리되는 「로타리」 맞은편 널박이라고 불리우는 산기슭에 그 전통을 자랑하며 일찍 사랑의 보금자리가 되어오던 전형적인 교회식 건물이 범일동(凡一洞) 교회라고도 불리우는 부산진(聖母無染始胎=釜山鎭) 천주교회이다.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지금부터 약 五십여년전 초량(草梁) 역전 철도병원자리에 얼마 안되는 돌집 성전을 마련코 외방인(外邦人) 신부들이 포교를 해오다가 백 신부(불란서인) 후임으로 있던 <벨라도> 서 신부가 이것을 팔고 현재 성당자리에 판자로 성당을 건립한 것이 그 시초라고 한다. 몇년후 남 신부(불란서인)가 벽돌로 종각을 세우는 한편 판자를 헐고 벽을 바르는 등 대수리를 하였다.
당시는 동래(東萊) 양산, 언양, 경주, 울산 등지 약 설흔셋이나 되는 공소를 관할했다.
그후 오(불란서인) 신부가 지금부터 약三십년전 성당을 헐고 지금 성당을 외국원조와 본당교우들의 협조로 건립했다는 것이다. 오 신부에 이어 노 신부, 하 신부, 서 신부 순으로 내려오다가 근년 <요셉> 정(鄭在石) 신부때 교리반을 신설하고 <가다리나> 조 여회장을 시켜 교리를 담당케 하는 한편 「소화보육원」을 건설코 불쌍한 고아들을 수용시키늰 등 일대 획기적인 발전을 보았다.
그후 강(姜) 신부(五七년) <야고버> 유(兪봉운) 신부가 본당신부로 피임되었다가 一九五八년 十월 十八일 현재 <안드레아> 허(許澈) 신부가 처녀부임을 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허 신부는 일찍 일본 「나가사기」 수도원에서 수도(修道) 하다가 「로오마」에 건너가 이태리에서 서품 받았다.
원래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본당이라 구교우가 많지만 부산본토백이는 거의 없을 정도라는 것.
타 지방에서 이주해온 이주민들의 생활이라 배교적 옹색한 생활을 하는 四천五백여명(서면으로 분리되기 전에는 六천명)의 교우들을 비우좋게 다루는 허 신부는 오늘도 묵묵히 성업에 여념이 없다.
이 본당은 다른본당과 달라 四십五명의 지구회장(地區會長)들이 본당 교우들의 손발이 되어 교무금, 배급 등 제반교회운영면은 주임신부의 간섭을 받지않고 자치제로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청년회(男 · 女) 성모성심회, 학생회 그리고 四개의 레지오 마리에(男 · 女)도 조직되어 삶에 지친 이곳 주민들에게 참된 신념과 재생의 길을 열어주고 있다.
주일 미사는 六시 三○분, 九시, 오후六시 세대가 있긴 하지만 성당이 비좁아 불편을 느끼고 있다.
부산 중앙성당과 부산교구 주교관이 설치되기 전에는 성체거동을 비롯한 교내 연중행사가 있을적마다 주동이 되어 성대히 베풀어지곤 했다는 것.
한때 부산교구 주교관 건립후보지로 선지(選地)되었으나 지금은 경쾌한 四층 백아건물이 우뚝 솟아 겸손, 순박, 사랑의 一천五백여 소화(小花)들이 장래를 기약(期約)하고 빛나게 피어나고 있다.
저멀리 오륙도(五六島) 바다 잠들때 하늘은 드높이 푸르고 아지랑이는 은은한 종소리의 메아리를 뒤쫓는다. (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