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시기는 예수 수난 여정을 되새기며 부활을 준비하는 기간이다. 특히 사순절은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킴으로써 신앙과 인간적 성숙의 바탕을 마련해 주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스도인은 이 시기에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하고 회개하며 나아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노력한다. 고통이 없다면 부활도 없다. 고통 속에는 희망이 숨어있고 고통 뒤에 참 기쁨이 있다. 사순시기를 맞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을 갖는다. 이 시대의 시몬, 이 시대의 베로니카, 이 시대의 예루살렘 부인들의 모습을 닮은 이들의 삶을 조명해보고 우리는 어떤 모습인지 묵상하는 시간이 되길 희망해 본다.
“그들은 예수님을 끌고 가다가, 시골에서 오고 있던 시몬이라는 어떤 키레네 사람을 붙잡아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님을 뒤따르게 하였다.”(루카 23, 26)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시던 그 언덕, 골고타로 가는 길가에 그는 서 있었을 뿐이었다. ‘가시관을 쓴 채 피 흘리며 걷는 저 만신창이’와 함께 십자가를 지게 되리라는 꿈조차 꾼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뜻하지 않게 예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십자가를 진 예수의 유일한 동반자가 됐다.
브라질에서 온 마르시아 수녀(자비의 메르세다리아스수녀회?42)도 엉겁결에 십자가를 넘겨받았다. 결혼을 앞 둔 스무살 어느 날, 수녀원에 혼자 입회하는 것이 두려우니 몇 달 만이라도 함께 지내달라는 친구의 간절한 부탁으로 ‘자비의 메르세다리아스’ 수녀회에 입회했던 마르시아. 수녀가 되겠다던 친구는 몇 개월 만에 수녀원을 떠나고, 결혼을 앞두고 있던 마르시아는 낯선 땅에서 수녀로 살아가고 있다.
“단 한 번도 수녀가 되리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친구따라 엉겁결에 수녀원에 들어가보니 너무나 편안하고 행복했습니다. 이제야 내 자리를 찾은 느낌이 들었어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별을 통보했을 때 너무 아프고 힘들었지만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1996년 종신서원 후 지원장이 됐던 마르시아 수녀를 하느님은 한국이라는 낯선 아시아 땅으로 불렀다. 언어, 문화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지만 마르시아 수녀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했다.
“처음엔 모든 것이 너무나 낯설고 힘들었어요. 2000년 1월 18일, 한국에 도착해 비행기에서 내렸는데 눈보라가 몰아쳤어요. 태어나서 처음 보는 눈이었죠. 살을 에는 듯한 추위도 처음이었어요. 한국에서 저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아기 같았죠. 그렇지만 주님이 보여주실 영광을 생각하며 참았습니다.”
3년 간의 어학공부를 마친 마르시아 수녀는 2003년 광주 노인복지회관에서 봉사를 시작했다. 100여 명의 독거노인을 돌보는 일이었다. 목욕 봉사, 설거지, 빨래 등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했다. 서툰 한국어 실력이었지만 말벗도 돼 드리고 병원에도 모셔갔다.
“광주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돌봐드리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정말 그분들의 가족이 된 것 같았어요. 너무 행복했습니다.”
외로운 어르신들의 좋은 딸이었던 마르시아 수녀는 2006년 춘천시립복지원 원장으로 부임했다.
“이 곳에서도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장애인들이 서로 도우며 사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이들은 서로 돕고 관심을 주고 사랑하고 함께 기도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살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해요.”
연신 ‘행복하다’, ‘감사하다’고만 말하는 마르시아 수녀에게도 고통스러운 순간이 많았다.
“제가 가장 아끼는 것은 가족이고, 그 중에서도 아버지입니다. 종신서원을 앞두고 한 달간 피정에 들어갔어요. 그 때 기도 중에 하느님께서는 내가 가장 아끼는 것을 봉헌함으로써 그로부터 자유로워지길 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이 잔을 거두어달라’고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하느님을 위해 봉헌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 달 후,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마르시아 수녀는 행복하게 아버지를 보내드렸다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가족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워진 순간, 모든 것을 뒤로하고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 고통은 오히려 선물이었어요. 아무 거리낌 없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었으니까요. 아픔과 고통의 시간이 있었기에 저는 진정으로 부활할 수 있었죠. 저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마르시아 수녀는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고통도 행복이라고 말한다.
“예수님 눈 앞에는 일생동안 하느님 밖에 안 보였어요. 자신의 삶 안에 오로지 하느님 뜻만 이뤄지길 바라셨죠. 죽음을 앞두고 너무 힘들어 겟세마니에서 울며 기도하실 때에도 ‘그러나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했어요. 예수님은 고통 중에 있었지만 마음만은 행복했을 거예요. 하느님의 뜻을 따랐으니까요.”
마르시아 수녀 역시 매 순간 충실한 딸이었다. 단 한 번도 하느님의 부르심을 외면한 적이 없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을 걸었다.
“고통 안에는 힘이 있어요. 힘들 때마다 십자가를 생각하며 참았어요. 예수님 십자가의 길, 마지막엔 ‘죽음’ 아니고 ‘부활’이에요. ‘십자가의 길’은 ‘부활의 길’이죠. 마지막엔 모든 게 잘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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